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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88ㆍ제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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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88ㆍ제1부 끝>

정승을 바꾸니 임금도 바뀌다

이해 6월에 한창 가뭄이 심했습니다. 좌정승 성석린이 임금에게 말했습니다.
"하늘이 오래 가물고 비가 내리지 않으니, 신이 섭리(攝理)를 잘 하지 못해 음양이 조화하지 못한 죄입니다. 사직해 사죄할 것을 청합니다."

임금이 그 말을 좋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좌정승 성석린과 우정승 민제가 편전에 들어가 경계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임금이 듣고 하루 종일 반성하고 근신하니, 비가 억수같이 내려 사흘만에 그쳤습니다.

성석린 등은 이런 말들을 아뢰었습니다.

"옛날 재상들은 홍수ㆍ가뭄이나 뜻하지 않은 변이 있으면 벼슬을 내놓아 재앙을 쫓으려 했습니다. 지금 가뭄이 극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그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털끝만한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주제넘게 재상의 우두머리에 있으니, 천심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원컨대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춘 사람을 골라 대신케 하소서."

"지금은 사방에 근심이 없고 공사를 일으키지 않아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맞춰 비가 오고 볕이 나지 않으니, 진실로 신들이 올바르지 못한 때문이어서 매우 두렵습니다. 또 신들이 넉넉하게 성은을 입어 항상 술과 음식에 배부른데, 지금 농사철에 볕만 나고 비가 오지 않으니 가을걷이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금주령을 내려 경비를 절약하게 하소서."

"지금 사방의 큰 폐단은 오로지 노비 문제 하나뿐입니다. 태상왕께서 깊이 그 폐단을 아시고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모두 공평하게 판결해서 쟁송(爭訟)을 없앴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다시 사헌부로 하여금 변정도감의 잘못 판결한 솟장을 받아 형조와 도관(都官)에 나누어 붙여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신들은 생각하건대, 이렇게 하면 2~3 년이 지나도 다 판결하지 못해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화기(和氣)를 상할까 두렵습니다."

"예전의 왕 노릇 하던 이들은 재이(災異)를 당하면 반드시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없앤 뒤 두려워하며 반성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한가롭게 쉬실 때나 움직일 때에 반드시 경계하고 조심해서 태만하거나 소홀함이 없도록 함으로써 하늘의 뜻에 응답하소서."

임금이 두 손을 마주잡고 낯빛을 바로잡으며 말했습니다.
"경들이 나를 가르치는 도리와 나를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하오. 경계하고 삼가는 일은 과인의 기질이 본래 나태하니 힘써 천심에 응할 수 없으나, 경들이 진심으로 나를 일깨우니 내 어찌 감히 힘쓰지 않겠소? 잘못 판결한 노비를 결단하는 문제는 다시 의논해 보고하시오."

이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두려워 반성하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밤이 되어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좌정승 성석린은 8월 들어 병을 내세워 사임했고 다시 어머니가 늙었다며 매우 간절히 사직을 청했습니다. 임금은 9월에 결국 성석린의 사임을 받아들여 창녕백(昌寧伯)으로 봉합니다.

민제(閔霽)는 좌정승으로 올라가고, 역시 세자와 가까운 하윤(河崙)이 새로 우정승이 됐습니다. 신하의 맨 윗자리인 정승까지 세자의 세력이 장악해버린 것이죠.

그러나 얼마 뒤 좌정승 민제는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우정승 하윤과의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우정승 하윤이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조세 제도가 고르지 못합니다. 경작 면적이 많은 민호(民戶)가 역(役)을 적게 지기도 하고, 경작 면적은 적은데 역을 많이 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경작 면적이 많고 적은 데 따라 부역의 수를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민제가 반대해 말했습니다.
"법이 이처럼 까다로우면 민심이 떠납니다. 지금 어떻게 시행할 수 있겠소?"

이때에 이르러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는데, 하윤이 경력 이관(李灌)을 시켜 이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해 아뢰게 했습니다. 일이 시행되기 전에 민제가 이관에게 허물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벌을 받으면 출근하겠다."

민제는 또 처남 때문에 구설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앞서 삼군부 참판 최운해와 예문관 학사 송제대(宋齊岱)가 중국에 갔다가 돌아와 서원군(瑞原郡)에 머물렀는데, 군수(郡守) 박희무(朴希茂)가 수행원들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최운해 등이 화가 나 박희무를 구타했습니다. 박희무가 곧 사헌부에 고하니,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처벌을 청했습니다.

"최운해와 송제대가 멋대로 수령을 구타했는데, 송제대는 옳지 못함을 깨닫고 이를 말렸습니다. 경중에 따라 처벌하소서."

최운해는 파직하고 송제대는 용서했습니다. 문하부에서 대사헌 정구 등 사헌부 관원들이 최운해․송제대 등의 죄상을 논한 것이 불공평하다고 탄핵하고 처벌을 청했습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앞서 사헌부에서 두 사람의 죄상을 논한 것이 송제대가 조금 가볍기 때문에 최운해만 파직한 것이다."

이에 낭사들은 정구 등이 법을 굽혀 공정치 못하게 한 죄를 탄핵했습니다. 송제대는 좌정승 민제의 처남이었습니다.

낭사가 대궐에 나아가 말씀올렸습니다.
"최운해․송제대가 함께 의논해 수령을 구타했으니 그 죄가 같은데, 지금 사헌부의 정구 등이 그 죄를 논하면서 억지로 경중을 나누었으니 뜻이 실로 공정치 못합니다. 신들이 그래서 사헌부 사람들을 탄핵한 것입니다. 원컨대 최운해 등을 법에 따라 처벌하소서."

그러자 임금이 최운해를 음죽(陰竹)에, 송제대(宋齊岱)를 백주(白州)에 귀양보냈습니다.

세자가 듣고 탄식했습니다.
"낭사에 사람이 있구나! 이 일이 대단히 정대(正大)하다. 송제대는 나에게 인척이고 좌정승의 처남이다. 사헌부에서 이 때문에 죄를 가볍게 했으니 잘못이다. 최운해는 용맹한 장수라 뜻하지 않은 변이 있으면 마땅히 외적을 막아야 할 텐데도 지금 밖으로 내쫓았는데, 어찌 송제대를 가볍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송제대 같은 자는 섬에 귀양보낸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다."

정승까지 완전히 세자의 사람으로 바꾼 것이 신호탄이었을까? 임금은 곧 세자에게 왕위를 내줍니다.

11월 11일, 삼군부 판사 이무는 교서를 받들고 도승지 박석명은 옥새를 받들어 인수부에 나아가 올리니, 세자가 울면서 받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령을 전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해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해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세자가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 교서는 문하부 참찬 권근이 지었습니다.

좌승지 이원을 태상왕에게 보내 선위할 뜻을 고하니, 태상왕이 말했습니다.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백관이 세자전에 나아가 하례를 올렸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세자에게 정사를 듣도록 청했습니다. 그 다음날 세자는 대궐에 나아가 조복을 갖추고 명(命)을 받았습니다. 수레를 타고 수창궁에 이르러 즉위하고, 백관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조선 왕조의 세 번째 임금인 태종입니다.

<제1부를 정종시대까지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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