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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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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87>

날개 꺾인 태상왕

태상왕에게 존호는 올렸지만 이미 날개는 꺾였습니다. 장군들의 모임인 장군방(將軍房)에서조차도 태상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으니 말입니다.

고려의 옛 제도에 장군방을 세워 방주(房主)와 간사 관원이 있고, 회좌회좌례(會坐回坐禮)가 있었습니다. 새로 장군에 임명되면 방주와 간사가 집안을 살펴보고 그 마음씨와 행실을 살피고 나서 회좌회좌례를 행한 뒤에야 새로 임명된 자가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는데, 조선 초에도 그 제도를 따랐습니다.

이때에 사알(司謁) 이덕시(李德時)의 아들 이등(李登)이 장군이 되었는데, 방주 박동미(朴東美)와 간사 김성미(金成美)는 이등이 내시의 후손이라며 회좌례(會坐禮)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등의 아내는 태상왕이 아끼던 궁녀의 딸이었으므로 태상왕이 듣고 화를 냈습니다. 임금이 사헌부로 하여금 박동미 등을 탄핵케 하고는 장군방을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한편으로 전 삼사 좌복야 이염을 충주에, 전 판사 이덕시를 이천현(利川縣)에 귀양보냈습니다. 이염과 이덕시가 덕수궁에 드나들며 온갖 이야기를 다 하니, 사헌부에서 듣고 글을 올려 임금을 속인 죄를 청한 것입니다.

태상왕이 몰래 신암사(新菴寺)에 가자 세자가 직접 가서 돌아오도록 청했습니다. 태상왕이 돌아오자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덕수궁에 나아가 술을 올리고, 한껏 즐기다가 끝냈습니다.

임금과 세자가 술을 올리니, 의안공 이화, 좌정승 성석린, 청천백 이거인, 승녕부 판사 우인열 등 원로들이 잔치에 참석해, 번갈아 일어나 술을 올렸습니다. 술이 거나해지자 태상왕이 연귀를 지었습니다.

밝은 달은 발(簾)에 가득한데 나 홀로 서 있네.

웃으면서 세자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비록 급제는 했지만, 이런 글귀는 쉽게 짓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계속했습니다.

산하(山河)는 예전 같은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나의 이 글귀에는 깊은 뜻이 있다."
임금과 세자가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태상왕은 총애하는 기생 무협아(巫峽兒)를 불러내 잔치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임금이 안팎 옷감을 내려주고, 세자가 비단 1 필을 내려주었습니다.

이튿날 임금과 세자가 덕수궁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연귀를 지어 부르면서 한껏 즐겼습니다. 태상왕이 읊었습니다.

나이 비록 칠십이나 마음은 서로 응하니

임금이 답했습니다.

밤은 이미 삼경인데 흥은 끝이 없네.

성석린․우인열이 잔치에 함께했습니다. 임금이 일어나 춤추고, 밤이 깊어서 끝났습니다.

임금은 연경궁(延慶宮)을 태상왕 궁전에 소속시켰습니다. 내시 박영문이 태상전에 아뢰니, 태상왕이 기뻐하며 박영문에게 말 1 필을 내려주었습니다.

태상왕은 신암사(神巖寺)를 중창(重創)하도록 지시하고 10월에 이방석․이제 등을 위해 신암사에서 크게 불사(佛事)를 베풀었습니다. 덕비와 정빈이 그 절에 가서 구경했습니다. 신암사의 간사승(幹事僧)이 갑자기 죽으니, 태상왕이 언짢아하며 돌아왔습니다.

태상왕은 다시 새 도읍에 거둥했습니다.
임금이 교외에서 배웅하려고 쫓아가 옛 동대문에 이르렀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태상왕은 밤 4경에 행차를 움직였습니다. 세자가 뒤쫓아 벽제역(碧蹄驛)에서 만났는데, 돌아가려 하니 대장군 박순이 말했습니다.

"태상왕께서 저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더라도, 여기까지 왔다가 갑자기 돌아가는 것은 신하의 마음이 아닙니다. 듣자니 태상왕께서 새 도읍에서 오대산으로 거둥하신다는데, 저하께서 따라가시면 태상왕께서 틀림없이 가시지 못하고 중지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멀리 오대산에 가신 뒤에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세자가 듣지 않았습니다.
태상왕의 행차에 역마(驛馬) 1백30 필을 독촉해 차출하니, 역리(驛吏)가 그 수효를 채우지 못해 도망치고 숨는 자도 있었습니다.

태상왕이 정릉에 이르러 정근법회(精勤法會)를 베풀었습니다. 태상왕은 옷을 벗어 부처에게 시주했습니다.

장차 오대산ㆍ낙산(洛山)에 거둥하려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행차가 가는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낭사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처음 창업한 임금은 자손이 마땅히 본받게 되는데, 지금 불사 때문에 멀리 지방에 행차하시니 실로 자손에게 계책을 남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나라 임금의 아버지로서 아무때나 출입하시고 나라 사람들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하니,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수상과 원로 공신 두세 사람을 보내 나라 사람들의 뜻을 아뢰고 행차를 돌이키도록 청해, 성체(聖體)를 보전하고 편안케 함으로써 신민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말했습니다.
"태상왕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재상을 시켜 청한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임금은 법왕도승통(法王都僧統) 설오를 새 도읍에 보내 태상왕에게 돌아오도록 청하게 했습니다. 설오는 청하지 못하자 모시고 오대산으로 갔습니다. 임금이 다시 삼사 우사 이직을 오대산에 보내 태상왕에게 문안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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