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ㆍ조영무를 다시 불러들이라고?"**
대간과 형조에서 글을 올려 이무ㆍ조영무 등을 불러들이자고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겸(兼)대사헌 권근, 좌산기 박은, 형조 전서 여칭이 합동으로 몇 번씩 글을 올렸으나, 임금이 태상왕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따르지 않았습니다.
좌정승 성석린과 우정승 민제 등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태상왕이 죄가 아닌 일로 공신 이무ㆍ조영무ㆍ조온 등을 견책해 내쫓으시니, 문무 백관이 놀라고 의심스러워하며 서운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원컨대 조정에 불러들여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소서."
임금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석린 등이 문무 백관과 더불어 글을 올려 3성의 청을 윤허하라고 청했습니다. 임금이 결단하지 못하니, 대간과 형조가 다시 대궐에 가서 간절하게 간했습니다.
임금이 도승지 정구를 시켜 3성에서 올린 글을 가지고 태상왕 앞에 나아가 사뢰었습니다.
"3성에서 이무ㆍ조영무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고 원로와 문무 백관도 불러들이도록 청하니, 신이 처결할 바를 몰라 먹고 자도 편치 못하고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직 명령대로 따르겠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재가를 내려주소서."
태상왕이 3성의 글을 보고 더욱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과인이 잘못이라고 하니, 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 가고 싶은 데로 가겠다."
이에 성석린ㆍ민제 등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왕에게 나아갔습니다. 태상왕이 성석린 등에게 말했습니다.
"경들은 왜 왔는가?"
"전하께서 요즘 불초한 한두 신하의 일로 성려(聖慮)를 어지럽히시니, 신들이 이 때문에 왔습니다."
"나도 그래서 왔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경들을 보고 나의 심사를 말하고 싶어한 지 오래였다. 두 정승은 나와 동료 재상이고 나머지 재상들은 모두 나의 휘하 사람들이니, 내 집안 일을 모르는 것이 없다.
과인이 다행히 조상의 덕과 천명이 모인 데 힘입어 조선을 창시하고 즉위한 지 7년 만에 맏아들에게 전해주었으니, 평생의 일에 다시 유감이 없다. 1398년에 피살된 어린 자식을 내가 어찌 생각하겠는가? 모두 천명이다.
내가 만약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보위(寶位)를 잃은 문제로 사직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면, 푸른 하늘이 증명할 것이다. 이천우는 본계(本系)가 매우 미천한데도 내가 선부(先父)의 은애(恩愛)하시던 뜻을 이어받아 부자 두 사람을 뽑아서 재상의 열에 두었는데 도리어 내 후한 은혜를 배반했으니, 사람의 도리에 맞는 일인가?"
대사헌 권근에게 말했습니다.
"유경(柳璥) 시중(侍中)의 첩의 손자가 본래 주인을 모해하다가 도리어 천역(賤役)이 되었음을 재상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조온이란 자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곤 가죽과 살덩이밖에 없다. 그가 입고 먹고 조정에 들어와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개국공신의 반열에 끼인 것은 모두 내가 해준 것이다.
조영무란 자는 동북면 호위군에서 발탁해 대장으로 삼아,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개국공신의 반열에 끼이게 했다. 이 세 사람은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 해도 어찌 내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소인이어서 1398년에 내가 몹시 아플 때에 나를 헌신짝 버리듯 배반했다. 조온과 이천우는 내 갑사를 거느리고 정사(定社)의 열에 끼였고, 이무란 자는 간첩 노릇을 하다가 역시 정사의 반열에 끼였다.
임금과 신하의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 오직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을 믿고 맡기면, 누가 임금 자리를 엿보지 않겠는가? 조선의 사직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성석린과 권근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경들은 지금 세상의 이름난 선비니, 어찌 한나라 고조가 정공(丁公)을 목베어 군중(軍中)에 돌림으로써 사직을 4백년이나 전한 것을 모르겠는가?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내가 임금 자리를 잃고 사랑하는 자식이 죽은 것이 한스러워 정사공신을 미워한다고 하는데, 지금 내가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막내아들을 세워 세자로 삼았으니 어찌 한스러워할 게 있겠는가?
내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으면 나를 죽이고 빼앗았을 것인가? 다만 한나라 고조의 마음으로 사직 만세의 계책을 염려하는 것뿐이다. 이무 등을 벌주거나 풀어주는 일 같은 것은 너희 임금에게 달려 있다."
그러고는 술을 가져다 성석린 등에게 마시게 하니, 성석린 등이 다시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대간과 형조가 다시 대궐로 가 그들이 올린 글을 윤허해달라고 청했으나, 임금이 역시 따르지 않았습니다. 낭사가 언관의 직책을 다할 수 없다며 모두 글을 올려 사직하고, 형조도 역시 사직했습니다. 임금이 모두 불러 업무에 나오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무ㆍ조영무ㆍ조온을 서울과 지방의 편한 곳에 거처토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거이도 끼워넣었는데, 대간에서 함께 글을 올려 이거이가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원망하며 교만하니 편한 곳에 거처케 할 수 없다고 말하자 서울 가까운 곳에 자원에 따라 안치하게 했습니다.
두어 달 후 임금은 이거이를 다시 문하부 판사에 임명하고 상당후 이저를 불러들였습니다. 이무(李茂)는 삼군부 판사, 조영무(趙英茂)는 문하부 시랑찬성사, 조온(趙溫)은 삼사 좌사로 돌아왔습니다.
후원(後苑) 양청에 술자리를 베풀고 이들을 위로했습니다. 세자와 의안공 이화, 완산후 이천우, 청원후 심종, 봉녕후 이복근 등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사관(史官) 김섭(金涉)이 배석했는데, 임금이 좌승지 민무질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사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도승지 박석명이 임금의 뜻을 알고 김섭에게 눈짓해 나가게 했습니다.
술이 거나해지자 임금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밤이 되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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