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왕과의 관계는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임금이 태상왕 궁전에 나아가 술을 올리려 하니, 태상왕이 취소시켰습니다. 태상왕이 내시를 시켜 명령을 전했습니다.
"요즘 가뭄이 너무 심하니, 잔치를 열고 즐길 수 없다."
임금이 명령을 듣고 그만두었습니다.
태상왕이 새 도읍에 거동하려 하자 임금이 교외에 나가 전송한 뒤에 사냥을 구경하려 했습니다. 대사헌 권근 등이 농사철이라며 전송하고 당일로 돌아오라고 글을 올리니 태상왕도 행차하지 않았습니다.
5월 말, 세자가 태상왕에게 인사를 갔다가 궁(宮)을 짓고 부(府)를 세우겠다고 고하니, 태상왕이 말했습니다.
"과인이 1398년에 태상왕으로 봉해진 뒤 부를 세우지 않은 지가 이제 이미 3년인데 특별히 빠뜨린 것이 없었으니, 구태여 다시 부를 세울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세자가 다시 태상왕에게 나아가 부를 세우기를 청하니, 태상왕이 말했습니다.
"전 왕조 공민왕의 어머니 홍(洪)씨는 여자면서도 부를 세워 숭경부(崇敬府)라 하고 여러 가지 일을 다 갖추었으니, 예전 법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3년이 되도록 부를 세우지 않았어도 옷과 음식이 떨어지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 다시 부를 세운들 내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날 태상왕 궁(宮)을 세워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하고, 부(府)를 승녕부(承寧府)라 했으며, 서열을 삼사 아래에 두었습니다. 우인열을 판사로 삼고, 손흥종ㆍ정용수를 윤(尹)으로 삼았으며, 소윤ㆍ판관ㆍ승(丞)ㆍ주부 각각 2명씩을 두었습니다.
우인열 등이 태상왕 궁전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태상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습니다.
이튿날 태상왕이 내시 이득분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미 내 부(府)를 세웠는데, 왜 인장(印章)은 만들지 않는가? 내가 일찍이 보니, 공민왕이 그 어머니 홍씨를 태후(太后)로 봉하고 인장을 만들어 두 시중(侍中)으로 하여금 조복을 갖추고 바치게 했다. 옛 의식을 어찌 폐할 수 있는가?"
임금이 듣고 태상전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갖추어 바치라고 의정부에 지시했습니다. 태상왕의 존호(尊號)를 올리기 위한 봉숭도감(封崇都監)을 두고 정승 성석린ㆍ민제와 삼군부 판사 하윤을 제조(提調)로 삼았습니다.
예조에서 태상왕의 존호를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올리도록 건의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임금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에 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존호를 올렸습니다. 그것이 끝나자 잔을 올렸습니다. 임금이 세자와 여러 공(公)들과 일어나 춤추며 한껏 즐기다가 저물어서 끝났습니다.
태상왕이 좌정승 성석린, 우정승 민제, 삼군부 판사 하윤에게 각각 대궐 말 1 필, 비단 각각 1 필을 내려주었으며, 삼사 좌사 이직, 삼군부 참판 최유경, 첨서 이문화, 전서 한상경 등에게 비단 각각 1 필을 내려주었습니다. 모두 봉숭(封崇) 의식을 주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세자가 덕수궁에 가니, 태상왕이 세자에게 문하부 참찬 조온을 비난하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고 해서 존호를 더하려 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그러나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들어보아라. 조온은 본래 내 휘하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발탁해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는데, 내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래로 아직 한 번도 와서 보지 않으니, 사람이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느냐?
1398년 가을에 갑사를 거느리고 안에서 숙위(宿衛)하다가 밖에 변란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호응했으니, 왔다갔다하고 충성스럽지 못함이 비길 데가 없다. 너희들은 너희를 따르고 아첨하는 것만 좋게 여기고 대의(大義)는 생각지 않느냐? 신하로서 두 마음이 있는 자는 예전부터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세자가 돌아와 임금에게 고하자 조온을 완산부에 귀양보냈습니다.
태상왕의 다음 표적은 동북면 도순문사 겸 영흥부 윤 이무와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부 윤 조영무였습니다. 세자가 다시 덕수궁에 가니, 태상왕이 세자에게 말했습니다.
"조온은 자부(姊夫)의 아들이고 조영무는 번(番)들던 군사인데, 내가 그 미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의관(衣冠)을 주기도 하고 관작에 임명하기도 했다. 재상으로 들어오거나 장수로 나갈 때마다 따라다니지 않은 적이 없어 결국 개국공신이 되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모두 내가 만들어준 것이다.
조온과 조영무가 모두 대궐 군사를 맡아 내전에 숙직했는데, 1398년에 과인이 병이 났을 때 옛날에 사랑하고 감싸준 은혜는 생각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내응했으니, 배은망덕한 것이 비길 데가 없다. 이무는 비록 조온ㆍ조영무에 비할 것은 아니나, 역시 과인에 의지해 원종공신에 끼였다. 이무는 본래 남은ㆍ정도전 등과 사이가 좋아 항상 서로 모의해 너희들을 쓰러뜨리려 했다.
1398년의 변란에도 왔다갔다하면서 간첩 노릇을 하며 중립을 지키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이기는 자를 따르려 했다. 마침 너희들이 이겼기 때문에 와서 붙었을 뿐이니, 이는 사태를 관망하는 불충한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도 모두 정사공신의 반열에 두었으니, 만일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1398년에 과인을 배반하던 일을 본받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고 한다면 이 세 사람을 처벌해 사직의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고 후세의 불충한 무리를 경계하도록 하라."
세자가 돌아와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이 할수없이 이무를 강릉부(江陵府)에, 조영무를 곡산부(谷山府)에 귀양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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