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병 해체해 나라에 바쳐라"**
1400년 4월, 사헌부 겸(兼) 대사헌 권근과 문하부 좌산기 김약채(金若采) 등이 합동으로 글을 올려 사병(私兵)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개국 후 훈신ㆍ종친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을 맡게 해서 급작스런 일에 대응토록 했는데 군사를 맡은 자가 도리어 문제를 일으켜 두 차례 변란이 일어났다며, 그동안 대간이 몇 차례 건의한 대로 개인 집의 군사를 없애라고 말입니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각 도의 절제사들을 모두 없애고 서울과 지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에 소속시켜 나라 군사로 삼으며, 궁궐 숙직 호위를 제외한 개인 집의 숙직은 모두 금지하고 출근하는 길에도 개인 수행원으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따르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글이 올라가니,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의논하고 곧 시행토록 지시했습니다. 이날 절제사들이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해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저는 평주에서 사냥하다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삼군부에서 이저에게 사람을 보내 빨리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이거이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불만을 품고 밤낮으로 모여 자주 분통을 터뜨리며 원망했습니다.
대간에서는 삼군부 참판 조영무와 문하부 참찬 조온, 삼군부 지사 이천우 등을 탄핵했습니다. 관원을 보내 그 집을 지키게 한 뒤 합동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조영무는 삼군부에서 군사와 무기를 거둬들일 때 바로 보내 바치지 않고 삼군부 사령(使令)을 때려 다치게 했으며, 그 군관 명부를 여러 날 동안 보내지 않고 개인의 수행원을 많이 숨겼다는 것입니다.
또 세자에게 사병을 없앤다는 이유로 함부로 불손한 말을 하면서 대들며 따지고, 서로 모여 음모를 꾸미고 화란을 선동하려 했다고 합니다. 이천우ㆍ조온 등도 모두 명부를 바로 보내 바치지 않고 여러 날을 끌면서 임의로 군사 수를 줄였으며, 모여 부도한 일을 꾀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임금이 따르지 않자 이날 대간이 다시 글을 올렸습니다. 임금은 공신이라며 또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날 대간이 또 글을 올리니, 임금이 말했습니다.
"조영무는 범한 것이 무거우니 지방에 귀양보내는 것이 좋겠으나, 이천우와 조온은 다시 논하지 말라."
조영무를 황주(黃州)에 귀양보냈습니다. 대간이 다시 글을 올려 조영무ㆍ이천우ㆍ조온 등의 처벌을 두 번이나 청했지만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간이 함께 대궐 뜰에 나아가 굳이 청했으나 임금이 또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간이 모두 언관의 책임을 다할 수 없다며 사직서를 올리자, 임금이 보고 놀라서 말했습니다.
"대간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곧 세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대간이 그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모두 사직하고 물러갔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는가?"
"간관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결심하고는 대간을 부르고 도승지 정구를 시켜 명령을 전했습니다.
"지난번에 경들의 아뢴 바가 옳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두 사람이 훈친(勳親)이어서 차마 갑자기 결단할 수 없었다. 내가 따르겠으니 경들도 업무에 나오라."
그러고는 사직서를 돌려주고 이천우와 조온의 관직을 파면했습니다.
세자가 간의 서유에게 일렀습니다.
"요사이 조영무ㆍ조온ㆍ이천우의 일은 처결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언관(言官)들이 글을 올려 '조영무ㆍ이천우 등이 음모하고 모였다'고 하니, 정말 그 말대로라면 국문해서 뒷날을 경계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하다. 다만 그 음모한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주상께서 어쩔 수 없이 우선 가벼운 쪽을 따라 파직만 해서 공신을 보전한 것이다."
"신들은 간쟁(諫諍)이 직책이라 감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요사이 전하의 처결은 곧 성인의 편법입니다."
조영무는 귀양지로 가는 도중에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부 윤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거이 부자에게는 우회적인 견제가 들어옵니다. 대간은 먼저 종친에게 일을 맡기면 책임을 묻는 경우가 생겨 친족의 정을 해치게 된다며 일을 맡기지 않아야 친족과 화목할 수 있다고 건의합니다.
개국 초에 공이나 재주가 있는 종친ㆍ부마를 조정 관리로 임명하기도 하고 병권을 맡기기도 해서, 크게는 군사를 끼고 화란을 꾸미고 작게는 법을 어겨 탄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종친ㆍ부마는 모두 군국(軍國)의 직무를 맡지 못하게 하고, 출입할 때에는 꼭 의장과 호위를 갖추어 나다니게 하자고 했습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사촌까지의 친족들은 직무를 맡기지 말고 모두 군(君)으로 봉하고, 나머지는 모두 논하지 말라. 의장과 호위에 대한 것은 예조에서 의논하라. 다만 과인은 부마가 없으니, 부마의 의장ㆍ호위와 일을 맡기는 문제는 의논하지 말라."
대간이 다시 합동으로 세 번이나 글을 올렸습니다. 이때에 태상왕의 부마인 이저가 삼군부 판사로 군정(軍政)을 총괄하며 횡포가 심했기 때문에 대간이 극력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부마는 동성 종친의 예와 같이 논할 수 없고 또 그 의장ㆍ호위도 나중에 마땅히 시행할 것이니, 지금은 우선 내버려두어라."
이날 대간이 다시 합동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임금은 종친ㆍ부마로 하여금 직무를 맡지 못하게 했으나, 의장ㆍ호위 제도는 다시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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