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산업 민영화를 둘러싼 노정간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연내 1개 발전회사 민간 매각을 고집하는 정부에 대해 발전노조가 한달 이상 파업으로 대립하면서 수천명의 대량해고 가능성마저 우려되고 있다. 이번 대결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 즉 DJ노믹스와 사회세력간의 최초의 정면대결이라는 점에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 프레시안은 DJ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정책에 대한 한신대 김윤자 교수(국제경제학)의 비판과 대안을 싣는다. 김 교수는 지난해 4월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이 발표한 <전력산업 민영화를 위한 비판과 대안> 연구보고서의 총책임자였다. 편집자
***DJ, IMF 서울지부장인가**
아무리 IMF구조조정 하에서 출범했다고 해도, 명색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내걸고 출범한 국민의 정부 하에서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시장경쟁과 효율만이 강조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하다. 오죽해 나름대로 친DJ로 분류되는 해외 석학들 사이에서 '서울의 IMF지부장'(IMF-man in Seoul)이라는 식의 우려가 나올까.
개발독재 이후의 '관치 폐해'를 개혁하기 위해서 경쟁을 통해 민간의 창의력을 활성화하고 이를 위해 주인있는 경영이 필요하다는 것은 현 정부 구조조정의 주요한 논변 중 하나였다. 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IMF는 구조조정프로그램을 통해 재정긴축ㆍ공기업민영화 등 정부 역할을 축소하고 시장원리를 확대하도록 강조해 왔다. 여기에 미국식 경제학을 답습해 온 일부 논자들은 시장경쟁이 만능의 해결사인 양 "경쟁=효율"이라는 교과서수준의 원론을 들이대며 민영화를 찬양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시장지상주의의 나라로 받드는 미국이나 서구에서 막상 시장원리는 자국 국민경제의 발전이라는 거시적 정책목적 하에 매우 선택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예컨대 WTO 뉴라운드협상에서 농산물시장의 개방이 쟁점이 되고 있지만 이들 나라의 농가소득에서 정부의 직접지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유럽연합 77%, 스위스 80%, 미국조차 51%인데 비해 우리는 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시장논리는 강자에게 유리할 때만**
시장원리가 아니라 농업이 사회경제에서 차지하는 환경적 문화적 역할을 감안하여 시장외적 원리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시장경쟁에 의한 효율성 제고'라는 논리를 들이대지만 선진국간 혹은 선후진국간 치열한 통상분쟁이나 투자협상 등에서 보듯 강자에게 유리할 땐 시장논리를, 불리할 땐 정부개입을 주장하는 것이 현대 국제경제의 현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통상법 수퍼301조일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는 경쟁을 통해 비효율적인 기업을 도태시키고 비약적인 물질적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바로 그 경쟁의 결과로 비효율적인 기업의 흡수ㆍ합병에 성공한 효율적 기업들의 몸집은 국민경제를 좌우할 만큼 거대해졌다. 또 자본주의 초기 소비재 경공업 중심의 소규모산업으로부터 중공업 우주항공산업 등 거대 산업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시장경쟁원리는 역사적 한계를 드러내고 국민경제의 거시적 조정 차원에서 국가의 개입이 필연화되었다. 문제는 어떤 국가의 어떤 개입이냐이다.
***국가의 공공적 역할 포기해선 안 돼**
이처럼 이미 경제규모가 거대해진 현대자본주의에서 시장논리는 어디까지나 국민경제 전체의 발전이라는 사회적 고려를 우선하면서 배치되고 있다. 관치의 폐해가 잔존하는 한국경제에서 시장과 민간의 역할은 그간의 비민주적 관료주의를 척결하는 장치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사회기반시설 등 이미 거대해진 우리 경제규모에 걸맞게 공익성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관치의 척결은 비민주적 정부의 권위적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지 마땅히 요구되는 현대국가의 공공적 역할을 사기업의 이윤추구원리에 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일 것이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최근 국가파산의 위기에 처한 아르헨티나에서 보고 있다. IMF의 처방과 모니터링에 따라 '대대적인 공기업 민영화와 모범적 개방정책'을 펼친 아르헨티나는 최근 외채누증 속에 국민경제의 실종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 1월말 IMF의 호르스트 쾰러 총재는 "아르헨티나 경제위기는 IMF와 국제사회의 실패작"이라고 시인한 바 있다.
***발전회사 민영화 민간독점 우려**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발전산업 민영화와 관련하여 정부는 공기업민영화가 세계적 추세라고 강변하는데 기간산업 민영화의 역사는 불과 10여년이다. 영국은 전력산업이 포화산업인 상태(전력수요의 성장이 안정되어 전력산업의 공급능력과 균형)에서 민영화를 시행하였고 우리와는 달리 높은 전력요금과 질 낮은 서비스 등 국민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 성패에 대해서는 지금껏 시비가 분분한데, 예컨대 민영화기간 중 영국은 북해 가스유전의 발견으로 연료비 인하요인이 발생하였는데 민영화 이후의 요금에 그것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배전회사 12개사 중 8개사가 민영화 6년만에 미국계 다국적기업에 경영권이 넘어갔다.
우리는 에너지 자급율이 2-3%에 불과하고 전력산업은 매년 수요 증가율이 10% 안팎에 달하는 성장산업이다. 정부에 따르면 2015년에는 지금의 2배에 달하는 8천만 Kw의 발전설비가 필요하다. 또 낙하산인사와 정경유착, 간부진의 과도한 접대비 등 시비가 있지만 그간 한국의 전력산업은 권위있는 국제 전력민간단체인 에디슨전기협회(EEI)로부터 에디슨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우수기업으로 선정되어 왔다. 그간 한전의 당기 순이익은 1998년 1조1,017억원, 1999년 1조4,679억원, 2000년 1조7천여억원을 기록하였다. 정부는 한전의 부채증가를 우려하는데 현재 한전의 부채비율은 민간 대기업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고 도입된 외채는 대부분 설비투자 자금으로 적어도 10년 이상 운용이 될 경우 회수에 큰 어려움이 없는 자금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전력요금은 그동안 경제성장정책과 물가안정 등을 이유로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되어와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이때문에 환경단체에서는 낮은 전력요금이 에너지과소비와 환경파괴를 부추긴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건 그렇다치고 정부의 말대로 한전의 5개 발전 자회사를 분할ㆍ매각하는 것이 과연 경쟁을 도입하는 것일까. 평균 자산규모 3조원에 이르는 이들 자회사를 민간에 매각했을 때 이는 경쟁체제라기 보다 오히려 과점상태에 가까워서 끊임없는 가격담합과 흡수ㆍ합병의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개발연구원이나 산업연구원 등 국책 연구기관에서조차 민간독점의 상황을 우려하여 정부의 민영화고집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제 값도 못 받게시리 매각시한까지 정해 놓고, 임기 말년의 극한적 노정대립을 무릎쓰면서까지 발전자회사를 서둘러 팔아치워서 어떤 정치적 경제적 실익을 도모하려는 것일까. 추상적일 뿐인 교과서 속의 경쟁 효율과 주인찾아주기를 위해서? 답답하다 보니 에너지다국적자본에게 발목이라도 잡힌 것일까 여기저기서 의구심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 야당의원은 정부의 공기업민영화방침이 나오는 1998년 7월 전후 미국 정부와 우리 외교통상부 및 산자부 간에 오고간 비밀문서를 들이대면서 미국의 압력설을 제기하기도 하고 한 경제주간지는 1999년 8월 당시 정부 고위관료조차 민영화반대 여론을 등에 업고 재협상에 나설 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보도하였다.
***공기업문제, 민영화보다는 지배구조 개선으로 풀어야**
발전 자회사의 덩치로 볼 때 정부가 추진하는 경영권매각의 대상은 재벌이나 해외자본이기 십상이다. 재벌의 경우는 당장 경제력집중의 문제가 있고 그러잖아도 지지부진한 재벌개혁은 더욱 후퇴할 것이다. 우리의 국제협상력이나 통제력만 전제된다면 선진 경영기법이나 선진 노사관계를 배울 수 있으니 외국자본에의 매각을 무조건 반대할 일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국민경제보다는 세계적인 투자전략 속에서 진퇴를 결정하는(그런 의미에서 '효율적'인) 외국자본에게 전력과 같은 기간산업을 맡기기에는 우리의 경제체질은 아직 너무 허약하다. 1997년 외환위기는 재벌의 방만한 차입경영 외에 우리의 경제력을 앞지른 섣부른 대외개방이 원인이었다.
오히려 전력산업의 발전을 위해 시급한 과제는 낙하산인사를 척결하고 전문책임경영을 확보하는 일이다. 대통령 한마디에, 장관 한마디에 발전회사 사장들이 오락가락하는 요즘의 행태야말로 공기업문제의 핵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소유구조개선=민영화'보다 '지배구조개선=공공참여적 전문책임경영'을 제안한다.
섣부른 민영화보다 전문가의 책임경영을 보장하고 공기업으로서의 공익성 및 경영효율을 감시하는 사회적 기제를 마련하는 것이 현 시기의 대안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 들어 대폭 개정된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은 이런 취지를 부분적으로 담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낙하산인사와 거수기 사외이사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므로 이를 노동조합, 국민을 대신한 시민ㆍ사회단체 등의 사외이사 추천 및 경영감시 보장 등을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또 관료주의적 군림과 공익서비스의 향상을 위해 노조도 공기업 자체개혁에 나설 필요가 있는데 예컨대 비리고발센터의 자체운영이라든지 환경친화적 기간산업발전을 위한 환경단체와의 연대 등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노동법 날치기통과로 정국혼란을 자초하였던 문민정부 말년을 상기하면서 요즘의 노정대치를 우려한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우리 역사가 발전해야 한다면 국민의 정부는 부디 다음 정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국을 잘 수습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존경받는 전임 대통령 한사람쯤 가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기는 존경받는 전임 대통령은 성숙한 국민들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바른 여론을 모아 정국을 밝힘으로써 통치자의 현명한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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