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말할 나위 없이, 박 변호사의 승리는 민주당을 비롯한 기존 정치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도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아직 선거과정에서 시민주체성과 시민참여의 새로운 모형을 보여준 것 같지 않다. 박원순 펀드, SNS를 통한 선거인단 모집 등의 실험은 의미가 있지만, 노무현의 희망돼지 모금, 개혁당의 인터넷 정당 실험 등보다 진일보했다고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나아가 박원순의 정치실험이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에 어떠한 모델을 보여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데 이에 대한 박변호사의 선택은 아직 미지수이다. 즉 박변호사는 1)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 2) 제3의 정당(시민운동 정당)을 창당하는 경우 3)민주당에 입당하는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느 것을 선택할지 모호하기만 하다.
▲ 10.26 보궐선거에 나설 야권 단일후보로 시민사회 진영의 박원순 변호사가 최종 확정된 후, 박 후보가 지지자들의 응원에 답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것은 미국 시민운동의 야전사령관이었던 랠프 네이더이다. 네이더는 사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자동차를 타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전설적인 시민운동가이다. 소비자 운동이 없었던 1960년대 그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회사인 GM의 운전자의 안전을 고려 않은 탐욕을 고발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불량차의 리콜, 안전벨트, 에어백 등 우리가 아는 자동차 안전장치를 도입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네이더는 박원순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워싱턴의 기성정치에 좌절을 느끼고 분노하다가 결국 정치의 길로 직접 뛰어들었다.
네이더는 2000년 대선에서 녹색당을 만들어 대선후보로 출마했다. 그가 이끈 녹색당은 보수양당제가 지배하는 미국정치에서 진보적 정책을 내걸어 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미국정치에 도입했다. 그러나 비례대표가 전혀 없어 각 선거구에서 1등을 하지 않으면 한 석도 얻을 수 없는 반민주적인 미국의 선거제도 덕분에 전국적으로 2%대의 지지를, 일부지역은 높은 지지율을 얻고도 가시적인 성과를 하나도 얻지 못 했다. 나아가 그는 2000년 대선의 최대 격전지였던 플로리다주에서 9만7421표를 얻었고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플로리다에서 537표 차이로 민주당 앨 고어 후보에게 승리를 거두고 당선되자, 고어의 발목을 잡아 부시를 당선시켰다는 오명을 얻었다.
그러면 박원순 변호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고 또 선택할 것인가? 박 변호사가 자신과 시민운동 진영이 그동안 꿈꿔 왔던 새로운 정치, 시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운동 세력이 중심에 자리 잡고 시민참여가 주된 동력이 되는 새로운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즉 네이더처럼 '제3의 정당'의 길로 나가 한나라당, 민주당과 다른 새로운 정당의 모형을 보여줘야 한다(물론 안철수 현상과 안철수의 제3의 정당론과 관련해, 이 면의 2011년 9월 11일자 "안철수 현상과 진보통합"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이념적으로는 제3의 정당이 한나라당, 민주당과 얼마나 다를 수 있지 회의적이지만). 이 시나리오로 나갈 경우 한국정치에 가장 큰 변화와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등 미국과의 선거제도의 차이에 의해 네이더의 녹색당과 달리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 변호사의 여러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 같은 계획은 아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안철수 교수를 둘러싸고 제기됐던 제3의 정당 움직임이 내년 대선을 겨냥해 내년에 출범하고 박 변호사가 합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가능성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박 변호사의 정치참여가 한국정치에 가장 파급력을 약하게 미치는 경우는 박 변호사가 민주당에 입당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박 변호사가 나경원 후보와 치룰 본선을 민주당의 조직력 등에 기대어 가장 수월하게 치루고 한국정치에 소프트랜딩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 변호사에 대한 지지의 기반인 무당파층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세력의 상당수가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 또 이같이 민주당에 들어갈 경우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시절부터 위기 때마다 반복했던 '새로운 피 수혈의 2011년 판'으로 끝나고 말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니면 아예 박 변호사뿐만이 아니라 시민운동 세력이 집단적으로 민주당에 들어가 민주당을 '접수'하고 내부에서 '정당혁명'을 하는 것도 상정해 볼 수 있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 변호사가 시민후보를 내걸어 무소속으로 본선에 임하는 경우이다. 이는 파괴력이라는 점에서 앞의 두 시나리오의 중간정도가 될 것이다. 정당에 속하지 않은 무소속의 시민후보가 주요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이는 지금까지의 정당정치에 대한 충격적인 경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한 개인의 승리로 국한되고 제3정당과 같은 제도적 힘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박 변호사는 현재 두 번째와 세 번째 선택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 변호사가 이 같은 선택으로부터 선거공약, 선거과정 등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 시민운동의 야전사령관이 정치판에 뛰어든 이상 기존정치와 다른, 시민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정치의 모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박 변호사의 정치실험도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피 수혈의 2011년 판'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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