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역사에서 유럽인과 유럽문명이 없었다면 지금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앞선 과학기술로 다른 어떤 문명보다도 먼저 전통사회를 벗어나 근대를 연 유럽인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자본주의적 팽창을 위해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세계를 차례차례 정복해 간 유럽인들, 그리하여 근대 세계사의 주역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유럽문명이 없었다면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유럽인과 그들의 기독교문명이 없었다면 인류는 과연 자본주의적 탐욕이 빚어낸 전쟁과 정복, 착취가 끊이지 않았던 지금의 세계 대신 여러 문명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른바 대체역사 기법으로 지난 14세기부터 현재까지 7세기에 걸친 세계사를 재구성한 소설이 최근 미국에서 발간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라는 작가가 지난 2월말 발표한 '쌀과 소금의 시대(The Years of Rice and Salt)'가 그 책이다.
이 소설은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던 14세기 중반에서 시작된다. 실제 역사에서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반면 이 소설에서는 유럽인의 1%만이 살아남는다. 유럽인들이 사실상 전멸한 것이다. 그에 따라 유럽인들의 기독교문명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사가 펼쳐진다. 유럽인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자 천하의 패권은 중국과 아랍권이 양분한다. 실제로 14세기 당시 중국과 이슬람권의 문명수준은 유럽보다도 우위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기독교는 역사의 유물로 잊혀져 가고 불교와 이슬람교의 세계의 지배적 종교가 된다.
유럽 대륙은 무슬림들의 차지가 된다. 한편 실제 역사에서는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반면 소설에서는 중국의 해군제독이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다. 뒤이어 이슬람세력도 대서양을 건너 미시시피강 하류에 상륙, 양대 세력은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일대 쟁탈전을 벌인다. 두 강국은 또 아프리카라는 먹이를 놓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아니라 동세서점(東勢西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국과 아랍이 세계의 중심이 되면서 지리 개념도 지금과는 전혀 딴판으로 바뀐다. 아랍권을 중근동, 중국을 극동으로 부르는 것은 유럽중심적 세계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설에서 스위스는 다르-알-이슬람(이슬람합중국)의 '중서부' 지방으로 불린다.
중국과 이슬람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쟁투하는 동안 이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제3세계'의 투쟁도 벌어진다. 양대 수퍼파워인 중국과 이슬람 사이에 끼인 인도는 중국과 이슬람의 정복 대상인 호데노사우니(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국가)와 함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768쪽의 대작인 이 책은 10부로 구성돼 각기 다른 시점의, 다른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지난 7백년동안에는 양대 수퍼파워의 60년에 걸친 '세계대전'이 벌어지는가 하면 중국 등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 정복과 이에 대한 저항 등 유럽인이 사라졌어도 전쟁과 정복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유럽인이 없다고 해서 르네상스와 계몽운동 등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중세적 신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진보적 운동이 벌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주역과 지역만이 달라질 뿐이다.
예컨대 르네상스는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에서 시작되며 인간성을 신이나 전제왕정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계몽운동은 인도 남부에서 발원한다. 또 이슬람 영토인 느사라(지금의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 전 세계를 풍미했던 것과 같은 반문화운동(counter-culture)이 벌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유럽인이 없었어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려는 듯하다.인간 해방과 진보를 위한 인류의 움직임, 또 그 과정에서 빚어진 전쟁과 정복 등은 계속됐을 것이며 다만 그 주역만이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 킴 스탠리 로빈슨은 역사학 박사 학위를 가진 SF(공상과학소설) 전문 작가로 '붉은 화성' '초록 화성' '푸른 화성' 등 화성 3부작으로 네불라상, 휴고상 등을 수상한 인기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다음은 미국의 진보적 인터넷 매체인 '살롱'에 실린 이 책에 관한 서평 중 주요 내용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역사에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의 최근 소설 '쌀과 소금의 시대(The Years of Rice and Salt)'처럼 와일드의 지적에 충실한 작업은 매우 드물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을 통해 로빈슨은 14세기 중반에 유럽 문화가 멸망한 세계의 역사를 새로 그렸다.
중세에서 2091년에 이르는 7백년의 역사를 그린 이 소설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것과 매우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본질적인 면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유사하다. 스토리는 중국과 무슬림 국가들이 전세계의 권력을 차지하고 발전한 인도 지역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연합이 세계의 나머지를 이루어 이들이 펼쳐나가는 세계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에 대한 흥미있는 상상**
'쌀과 소금의 역사'를 중단 없이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로빈슨 자신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 세계까지, 7백년에 걸쳐 세계 각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과 역사를 조합하는 작업을 상상해보라.
단순히 10세기 베이징의 모습을 개연성 있게 묘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서구 식민주의가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문명 교류가 이루어지고 문화가 꽃피고 기술과 철학이 발전하는가를 추측해내기란 여간한 일이 아니다.
또한 '쌀과 소금의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점은 그처럼 광활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 감성의 단면을 세밀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장구한 시간과 전세계 수많은 지역들을 독자들 앞에 전달하기 위해 로빈슨은 영혼의 환생이라는 장치를 사용했다.
10권으로 나뉘어진 이 소설에서 각권은 각각 다른 시간과 다른 지역을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남자, 여자, 혹은 역사적 저명인사 등으로 환생하지만 근본적 특성은 동일하다. 독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로빈슨은 각각의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이름을 K, B, I 등 항상 똑같은 이내셜로 시작했다.
***주요 등장인물**
K : 중국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다가 내관에게 거세당하는 다혈질의 아프리카 젊은이(육체적 결함은 K의 화신들에게 있어서 순환되는 특징이다.)
B : 온화하고 예의바른 인물. 역병이 창궐한 유럽 마을을 직접 목격한 몽고인 마부가 첫 번째 삶.
I : 광범위한 지적 욕구를 소유하고 있는 인물. 중국 요리법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항저우 식당주인으로 처음 등장.
***중심 내용**
이상의 주요 인물들은 일생을 마치고 환생하기까지, 신들이 통치하는 '바르도'라고 불리우는 지역에서 머문다. 그리고 바르도에서만 이들은 서로의 영속적인 특성을 깨닫게 된다.
환생은 7백년의 시간을 이야기로 구성하기 위한 장치이다.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념적으로 동양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완벽한 방법이다. 이 소설에서 동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이 아니다.
소설에서 유럽은 북부 아프리카 무슬림들이 정착하는 지역으로 묘사되며 이 곳에서 B는 새롭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측근, 수피라는 사람으로 환생한다. 아름다운 왕후로 등장한 K는 베일을 쓰기 거부하는 등 열렬한 초기 페미니스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후 K는 코란이 얼마나 왜곡돼 있으며 회교도들에 의해 잘못 전해졌는지를 설명한다. 그녀는 "우리는 신 앞에서 모두 평등하고 우리와 신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없다. 모든 무슬림들은 이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속의 3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 B는 "계율은 무시할 수 없다. 당신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서 단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곧바로 천국으로 갈 수는 없다"고 말한다.
K는 이를 무시한다. 라틴아메리카를 발견한 중국 해군 제독으로 환생한 K는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한 신'에게 분노하고 여신 칼리에게 반항한다. 그처럼 반항적인 충동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K의 운명은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여자, 혹은 복잡한 기질을 가진 인물로 환생하게 한다.
반면 B는 '사랑을 중심에 두고' 과거에 이어 희망을 추구하며 정의로운 세계를 위한 노력이 K와 I의 성격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I의 역할은 B와 K에게 '신은 잊어라. 자신에게 몰두하면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드는 세계에도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있다. K의 일생 중에는 I와 함께 사마르칸드에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갈릴레오 같은 연금술사도 있다. 한편 중국 제국의 변방을 끊임없이 노략질하는 일본인 유민으로 환생한 B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잉조우(미국)의 식민지화하려는 중국의 제국주의자들을 격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또 인도 남부에서는 K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로 계몽운동이 개화한다. '제국이나 왕국도 없고, 칼리프, 군주, 족장도 없고 왕이나 왕비, 왕자도 없고, 신학자들도 없는' 세계를 꿈꾸면서
그러나 결국 그곳에는 60년동안 이어지는 '오랜 전쟁'이 도래한다. 모든 사람들이 군인이 되고 티벳 산맥에는 무시무시한 변화가 드리워진다. 아수라 신의 병졸 B는 모든 인류가 바르도에 떨어져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혼돈 속에서 세상은 큰 전쟁에 휩싸인다. 얼음과 검은 바위가 하늘의 별을 가리고 깃발이 산꼭대기에서 부는 혹한 바람에 휘날린다. 일몰이 시작되면서 아수라의 불꽃이 수평선 위에 타오른다. 아수라의 왕국은 깎아지는 듯한 절벽에 서있다."
시간이 지나 인간성이 회복되고 세계는 60번째 단계에 접어든다. 느사라(프랑스)의 해안국가에는 저항문화가 절정을 이룬다. 이 단계에서 B는 알프스의 완고한 무슬림 가정에서 도망친 젊은 여성으로 환생한다. 그리고 군부독재 저항운동을 지도하는 선동적 교사로 환생한 K를 만난다. 그동안 과학자 I는 다른 물리학자들과 비밀리에 엄청난 작업에 몰두한다.
유토피아적인 기질 때문에 어떤 면에서 로빈슨의 역사 뒤집기는 과도해 보인다. 과학자들의 국제연합이 핵무기 개발을 차단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했을까? 산업화가 요구되는 사회구조를 도입하지 않고 어떻게 세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쌀과 소금의 시대"는 매우 장대하고 끊임없이 독자들을 매혹시키는 책이다. 천일야화를 이야기하듯이 각 단락이 끝나면 독자들은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소설에는 이슬람권에 관해 매우 정교한 성찰이 있다.
로빈슨이 상상해낸 세계가 현실세계와 마찬가지냐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매우 힘들다. 이 소설에는 현실과 다른 역사와 인간 특성이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뒤엉켜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가공되지 않은 인간성에 기대 우리의 운명을 그려낸다. 물론 야만과 이기주의가 존재하지만 우리의 진지함, 인간적 감성,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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