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子路)**
和(화) : 화목하다. 평화롭다.
同(동) : 같다. 부화뇌동하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잘못인 것은 화(和)와 동(同)을 대비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대비시킴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단독자(單獨者)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것은 다른 모든 것과의 차이를 전제(前提)함으로써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나아가서 보편성에 대한 특수성의 개념이라든가, 본질에 대한 현상의 개념이라든가, 이념에 대한 현실이라는 개념 역시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소위 독특(獨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세계는 통체적(統體的)이기 때문에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 즉 개념적 방법으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인식과정의 불가피한 방법상의 문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부분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전체의 모습을 못 보게 하지요. 이것이 분석(分析)과 전문화(專門化)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고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일차적 인식 소위 감성적(感性的) 인식은 세계에 대한 부분적 인식일 수밖에 없고 또 전체로부터 분리된 부분을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상을 더욱 정치(精緻)하게 개념화하는 방식은 전체와의 거리를 더욱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화과정에서 대상 그 자체가 관념화된다는 사실이지요.
이에 비하여 대비(對比)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關係網)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 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 있어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다소 관념적(?)으로 흘렀습니다만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화(和)와 동(同)의 대비가 불가능합니다.
화(和)가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의미로 사용되고 동(同)이 부화뇌동(附和雷同)과 동일(同一)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어느 경우든 화(和)와 대(對)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同)의 의미도 처음 구에서의 의미와 다음 구에서의 의미가 각각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 구에서는 부화뇌동 즉 자신의 분명한 입장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다음 구에서는 동일함 즉 차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윤리적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라면 새롭게 재조명할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