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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아프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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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아프간' <5>

파, 배고픈 난민 모아 탈레반 양성

약 20년전까지, 계절에 따라 가축을 몰고 이동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프간 농부들은 국외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해외로의 여행은, 아무리 짧은 것이라 해도 아프간의 운명에 심각한 흔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아마눌라 칸과 서방으로 유학한 일단의 유학생들은 아프간의 실패한 근대화 실험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 아프간 인구 30%의 국외 망명은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과 가난이 그들을 떠나게 만들었고 그 엄청난 숫자는 이제 이들이 망명해 있는 국가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란에 2백50만, 파키스탄에 3백만이나 되는 이들 아프간 난민은 두 나라에 커다란 골칫거리다. 아프간 난민의 본국 송환을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이들은 우리 손님이 아니냐’고 내가 항의하자 그들은 ‘20년이나 계속되는 이 파티가 지겹다’고 대꾸했다.

호라산, 시스탄, 발루체스탄 지역 등으로의 난민 유입이 계속된다면 이 지역의 국민적 정체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이 지역의 독립 요구, 국경지역의 안보 불안 등 보다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회교도 무자헤딘을 양성하기 위해 탈레반 학교를 대거 설립한 파키스탄과는 달리 이란 사회는 아프간 난민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어떠한 학교의 설립도 계획하고 있지 않다. ‘사이클리스트’를 제작하면서 배우를 발굴하기 위해 아프간 인근 지역에 가보곤 했다.

그 당시 한 아프간 관리는 이란 대학들이 아프간 학생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련이 물러가고 나서 최소한 학사 학위를 가진 장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수많은 전사들로 전쟁은 할 수 있겠지만 나라를 다스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중에 아프간 학생 몇 명이 이란 대학에 받아들여졌지만 현재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프간에 돌아가려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 이유로 굶주림과 사회 불안을 꼽았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아프간에서의 최고 생활수준이 이란에서의 최하 생활보다도 못하다고 말했다. 하긴 지난 해 헤랏에서 들은 바로는 헤랏 총독의 월급이 15 달러라고 한다. 하루에 50 센트 이란 돈으로 치면 4천리알에 불과하다.

아프간인의 국외 망명이 하도 많아지다 보니 최근 이란 밀수꾼들에게는 인간 밀수가 새로운 유망 사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경을 넘었다 해도 테헤란까지의 먼 길을 가다 보면 자볼이나 자헤단, 케르만 등 도중에서 붙잡힐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난민 가족들은 그들의 운명을 이들 밀수꾼의 손에 맡긴다. 밀수꾼들은 이들을 트럭으로 테레란까지 태워다 주는 데 1인당 1백만 리알을 요구한다.

난민중 99%는 그토록 많은 돈이 있을 턱이 없으므로 가족들은 열서너살 먹은 딸 둘을 인질로 남겨두고 뒷길로 테헤란에 들어간다. 딸들은 돈을 갚을 때까지 인질 생활을 해야 한다. 대개의 경우 난민들이 그만한 돈을 벌지 못한다. 가족이 10명이라면 갚아야 할 돈은 1천만 리알. 석달 후부터는 이자도 갚아야 한다.

결국 수많은 아프간 소녀들이 국경 부근의 인질로 남겨지거나 밀수꾼의 개인 소유물이 된다. 국경 지역의 한 관리는 단 한 도시에 잡혀 있는 소녀 인질의 숫자가 대략 2만4천명이나 된다고 전했다.

테헤란에 자기 집을 짓고 있었던 친구 하나가 자신이 부리던 아프간 노동자들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가끔씩 이란인 2명이 나타나더니 이들에게 돈을 받아가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프간 노동자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나중에 돈을 벌어 갚는 조건으로 이란에 들어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본국에 송환될 때를 대비, 가족들에게 가져갈 돈을 조금씩 저금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에 있는 아프간 난민의 상황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이란으로 오는 난민들은 대개 하자레족이다. 이들은 파르시어를 말하고 이슬람 시아파에 속한다. 이란과 말이 같고 종파가 같기 때문에 가급적 이란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독특한 용모 때문에 이란에서 설움을 받는다. 몽골적 외모 때문에 금방 이란 사람과 구별되는 것이다.

반면 파키스탄으로 들어가는 파쉬툰족은 별 어려움없이 파키스탄인과 융합돼 산다. 말이 같고 종교와 종족도 같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이 이란보다 자유롭기는 하지만, 시아파 하자레족은 자유로운 파키스탄보다는 일자리가 있는 이란을 택한다. 다시 말해 빵이 자유에 우선한다는 얘기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배가 불러야 한다.

파키스탄에서는 적당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배고픈 수니파 파쉬툰족 아프간 난민은 대체로 신학교로 가기 마련이다. 이곳에서는 언제나 빵과 잠자리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아프간 난민 문제에 조직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있는 이란과는 달리 파키스탄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탈레반을 지원하고 조직해 탈레반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두란드선(Durand line)이다.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독립하기 전, 인도와 국경을 맞댄 아프간은 파쉬투네스탄 지역을 놓고 인도와 심각한 국경 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국은 두란드선으로 이 지역을 둘로 갈라 반쪽씩을 양국에 귀속시켰다. 단 1백년 뒤에는 인도쪽 절반을 아프간에 양도한다는 조건이었다.

그후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인도가 가지고 있던 파쉬투네스탄의 절반은 파키스탄에 귀속됐다. 국제법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이미 60년전에 이 땅을 아프간에 양도해야 했다. 지금도 카슈미르(현재 인도 영토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파키스탄이 이 땅을 고분고분히 아프간에 내주었을 것 같은가?

최상의 해결책은 굶주린 아프간 무자헤딘을 양성해 이들로 하여금 아프간을 통치토록 하는 것이다. 파키스탄이 길러낸 탈레반들이 자신들의 후원자가 갖고 있는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백년 시한이 다가오면서 탈레반이 나타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얼핏 보면 탈레반은 비합리적이며 위험스런 근본주의자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학교를 택한, 가난한 파쉬툰족 고아들일 뿐이다. 탈레반의 탄생 과정을 잘 뜯어 보면 파키스탄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간파할 수 있다.

파키스탄이 간디의 민주적 인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유가 근본주의 때문이라고 한다면 아프간을 발판으로 한 파키스탄의 생존과 확장에도 이 이유는 적용된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 국제사회에서 파키스탄의 중요성은 공산주의 동방에 대항하는 서방의 최초의 방어 진지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프간 전사들이 서방 언론에서의 영웅적 지위를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파키스탄도 전략적 중요성을 상실했고 이에 따라 심각한 고용 위기에 직면했다.

사회학 원리에 따르면 모든 조직은 무엇인가를 사고 판다. 이 정의에 따르면 군대는 자신의 군사서비스를 조국, 또는 다른 나라 정부에 제공하는(즉, 파는) 셈이다. 서방과의 관계에서 파키스탄이라는 국가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일견 동방 군대의 역할을 떠맡으면서, 그러나 내부적으로 서방적 가치체계에 소유되어 미국에 군사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소련이 소멸하면서 파키스탄의 군사서비스에 대한 서방측의 수요도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파키스탄은 어떤 시장에 자신의 군사서비스를 내놓아야 이 지극히 중요한 국가적 직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창설해낸 이유였다. 즉 아프간에 대해 암묵적 지배력을 행사하며 아프간으로 하여금 파쉬투네스탄 양도 요구를 포기토록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파키스탄이 고용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같은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일 영화제작자인 내가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다면 나는 내 직업을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야 한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일단 전쟁이 끝나면 각 부대들은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시장을 찾아 나서야 한다. 만일 다른 시장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다른 경제활동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후자의 사례는 군대조직을 교통통제나 농사일, 도로건설 현장 등에 투입한 몇몇 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다 넓은 세계에서 전쟁은 군수물자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 정부지출을 증대시킨다. 이제 다시 국외망명의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이란과는 달리 파키스탄은 아프간 난민들은 종교·정치적 학생으로 활용했으며 이들을 바탕으로 탈레반군을 창설했다.

소련이 침략하기 전, 대개의 아프간인들은 농부였다. 소련의 공격과 함께 각 아프간인들은 자신의 계곡을 지키려는 무자헤딘으로 변신했다. 조직과 정당들이 결성됐다. 소련이 물러가자 각 분파와 그룹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아프간과 이웃한 여섯 나라들은 여러 군사조직 중에서 자신들의 용병을 찾아 나섰다.

내전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2년간의 내전에 따른 파괴가 소련의 10년 점령에 의한 피해보다 더 컸다. 사람들은 내전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으며 파키스탄이 보낸 탈레반군이 무장해제와 평화를 외치며 백기를 들고 나타나자 이들을 환영했다. 짧은 기간동안에 탈레반은 아프간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탈레반의 파키스탄적 뿌리가 드러난 것은 이때부터였다.

탈레반은 언제나 근본주의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을 받지만 그들이 출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헤랏 출신의 아프간 시인은 걸어서 이란에 왔다가 걸어서 아프간으로 돌아갔지만, 걸어서 파키스탄 페샤와르에 갔던 아프간 고아는 아랍 국가들이 제공한 토요다 차를 몰고 아프간의 정복자로서 고향에 돌아갔다.

그 자신의 국민들도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하는 파키스탄이 어떻게 해서 탈레반을 먹이고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수 있었을까? 사우디 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연합과 같은 아랍 국가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들은 이란의 경쟁자로서 이전에 메카의 긴장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란의 종교적 영향력에 대항하려 하고 있다.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모토 때문에 자신의 근대적 이익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 등은 이슬람에의 복귀가 목표라면 탈레반처럼 보다 억압적인 이슬람으로 복귀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모두가 이슬람에의 복귀를 경쟁하고 있고 가장 복고적인 분파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고 한다면 이른바 탈레반주의와 같이 가장 원시적인 국가형태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탈레반은 누구인가?**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국민이 국가로부터 요구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이다. 복지라든가 경제개발, 자유 등은 그 다음 문제이다. 소련이 물러간 후 시작된 격렬한 내전은 전국적인 안보 불안을 초래했고 나라 전체가 매우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각 그룹들은 끊임없는 전투를 통해 각자의 안보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전국적 차원의 안전을 제공하는 데 성공한 그룹은 없었다. 이 시기의 아이러니는 각자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행위들이 곧바로 나라 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평화의 전위대임을 내세우며 무장해제를 외쳤던 탈레반은 빠른 시일 안에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그룹들이 실패했던 이유는 전쟁을 통한 안보 확보에만 주력했기 때문이다. 헤랏에서 나는 탈레반에 관해 물어 보았다.

한 가게 주인으로부터 내가 들은 말은 탈레반 전에는 매일 무장한, 배고픈 사람들에의 해 가게가 털렸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탈레반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탈레반이 가져온 안보에는 대만족이었다.

안보는 2가지 방식에 의해 성취됐다. 하나는 대중들의 무장해제였고 다른 하나는 도둑의 손목을 자르는 것과 같은 중형 제도의 시행이었다. 그 형벌들이 어찌나 신속하고 지독했던지 배고픈 사람 2만명이 제 눈앞에 떨어진 빵 한 조각을 보고도 누구 하나 그 빵을 집어들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아는 트럭 운전사중에 2년간 아프간을 들락거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결코 트럭 문을 잠그지 않았다. 한번도 도둑맞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프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 안보만이 아니었다. 신체의 안전과 성적 폭행으로부터의 안전도 언제나 주요한 관심사였다. 탈레반이 집권하기 전, 사람들의 생명과 여성의 순결 등이 다른 부족이나 분파들에 의해 유린된 사례들을 나는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러나 무장해제와 돌팔매에 의한 처형 등으로 이같은 범행들은 크게 줄었다고 한다.

오늘날 아프간에 가 보면 길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움직일 힘도 없고 싸울 무기도 갖고 있지 않다. 중벌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로 하여금 범죄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길거리에 엎어져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인간성이 무관심에 압도되는 순간이다. 우리 시대는 사디가 말한 “모든 인류는 한몸”의 시대가 아닌 것이다.

아직까지 가슴이 돌덩이로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바미안의 불상이다. 그 자신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비극에 무력감과 부끄러움을 느낀 그는 스스로 무너져내려 버렸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부처의 가르침은 빵을 원하는 이 나라의 참상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따라서 스스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부처는 이 가난과 무관심, 억압과 피할 수 없는 죽음 등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스스로 무너졌다.

그런데도 물정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불상의 파괴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선종(禪宗)의 가르침에 이르기를, ‘달을 보라 가리켰건만 달은 보지 않고 내 손가락만 보는구나’라고 했다. 누구도 부처가 가리키는 죽어가는 아프간 국민들을 보지 않고 있다,

온갖 의사소통의 수단들이 가리키는 그 참상의 현장을 보기보다는 그 전달수단만을 바라봐야 한단 말인가? 탈레반, 또는 그들 근본주의의 무관심과, 이 불쌍한 나라의 불행한 미래에 대한 지구인들의 무관심 중 과연 어떤 쪽이 더 심각한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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