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은 미국에게 제2의 베트남이 될 것인가. 3주 이상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공습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미국 지도부의 초조함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달 30일자 뉴욕타임스의 사설이다. 미 지도층의 의중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뉴욕타임스의 사설, ‘조기 승리는 없다’(NO Early Victory)는 이렇게 시작된다.
“미군의 공습이 3주 이상 계속되면서 공군력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여전히 은신처에 건재하고, 탈레반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미군은 지난 금요일 적십자 창고를 또다시 오폭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아프간 신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던 반군 지도자 한명이 탈레반에 붙잡혀 처형됐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설은 이어 공습이 장기화되면서 동맹국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으며 특히 파키스탄 등 이슬람 동맹국에서는 조기 공습중단을 촉구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또 공습이 시작되기만 하면 탈레반 지도부의 대거 이반(離叛)이 있을 것이라는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탈레반은 굳게 단결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반군 지도자 압둘 하크의 처형은 더더욱 뼈아픈 손실이라고 인정했다.
10월 7일 공습 시작 이후 탈레반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뉴욕타임스의 이 사설에 잘 드러난다. 사설은 “탈레반은 무적(invincible)이 아니다”라면서 “그러나 그들은 강인하고 자원이 풍부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공습만 시작되면 탈레반 정권은 풍비박산날 것이라는 당초 서방측의 장담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설은 “겨울이 오면 사정이 더 어려워지겠지만 미국인들은 테러리즘과의 장기 군사투쟁에 대비해야만 한다. 조기 승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아프간전쟁의 장기화를 인정하면서 미 국민들의 인내심을 촉구한 것이다.
미국의 아프간 군사작전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지난 주 분명해졌다. 미군 지도부가 지난 주말 브리핑에서 탈레반의 끈질김에 “놀랐다”(surprised)는 표현을 쓴 것이다. 빈 라덴의 제거, 탈레반의 축출 등 군사작전의 목표가 성취되지 않았고, 탈레반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끈질기다면 전쟁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현재 대부분의 군사전문가들은 탈레반이 이달 중순의 라마단 시작 때까지는 미군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달간의 라마단이 지나면 겨울이 되고, 겨울이 되면 지상군 작전은 더욱 어려워진다. 아프간전쟁이 해를 넘길 공산이 커진 것이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아프간이 제2의 베트남이 되는 게 아니냐는 다소 성급한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적 고려가 군사작전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베트남전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군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탈레반 정권을 궤멸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미군은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목표는 탈레반의 축출에서 끝나지 않는다. 탈레반 정권의 기반이며 아프간의 최대 종족인 파쉬툰족까지를 아우르는 친서방 신정권을 세워야 한다. 미군이 수도 카불 공략을 애써 미루어 왔던 것도 이러한 신정권 구상이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간 공습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지도층과 국민들 사이에서도 미세한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주초 미 상원 외교위원장인 조셉 바이든 의원(민주당)은 “도대체 공습이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이냐”라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바이든 의원은 “공습이 계속되는 매 시간마다 우리는 이슬람세계에 대해 톡톡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며 공습이 장기화될 경우 세계는 “미국을 첨단무기를 앞세운 깡패로 여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교정책에 관한 한 매파로 알려진 바이든 의원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공화당측은 “적들을 이롭게 하는 발언”이라며 즉각 성토에 나서는 등 이견이 노출되고 있다.
반면 우익측에서는 동맹국들과의 공조를 중시하는 현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며 외교적 고려에 얽매이지 말고 즉각 군사 목표를 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례로 우파의 정파지인 주간 스탠다드는 “파키스탄 등 동맹국들의 요구 조건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 보면 미국의 군사작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면서 일방적인 군사작전 강행을 촉구했다.
한편 미국내 탄저균 테러가 속출하고, 9.11테러 수사 과정에서 이유없는 체포가 늘어나며 정보통제 등이 강화되면서 미 국민들의 불안은 커져가는 반면 정부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점차 퇴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의 53%가 또다른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달전 36%에서 크게 늘어나 것이다. 또 약 절반은 ‘정부가 탄저병에 대한 정보를 모두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답변했다.
반면 ‘정부가 테러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것을 확신한다’는 응답은 한달전 35%에서 18%로 격감했다. 또 ‘미군에 의한 빈 라덴 제거를 확신한다’는 응답은 한달전 38%에서 28%로, ‘미국 주도 반테러 국제연대의 유지’에 대한 확신도 한달전 46%에서 29%로 크게 줄었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9.11테러 이후 “처음으로 미 국민들이 테러전쟁의 국내외적 목표 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87%, 의회에 대한 지지도 67%로 지난 70년대 이후 최고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아직은 미 국민들이 정부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미 국내의 테러 피해가 늘어날 경우 민심의 변화가 어찌될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미 테러전쟁에 대한 이견과 회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브레진스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기 6개월전부터 자신의 주도로 이슬람 과격파 무자헤딘을 지원했다면서 소련을 ‘아프간의 덫’에 빠뜨린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했다고 한다. 과연 미국은 자신이 만든 ‘아프간의 덫’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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