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16일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기 수시간전, 아프가니스탄의 전 국왕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보낸 특사 3명이 이곳에 도착했다. 이보다 하루전에는 아프간 현 탈레반 정권의 외무장관에서 반군 북부동맹으로 가담한 물라 압둘 와킬 무타와킬이 이곳에 나타났다.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탈레반 이후 아프간 신정권 구성에 필요한 세력들이 대충 모인 셈이다. 파월 장관은 이미 파키스탄으로 오는 기내에서 리처드 하스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을 미 정부의 아프간 특사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하스 특사는 앞으로 유엔을 비롯한 이해 당사자들과 아프간 신정부의 구성과 형태에 관한 협의를 맡게 될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테러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1차 목표는 물론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와 그를 비호해 온 탈레반 정권의 축출이다. 그러나 이는 서막에 불과할 뿐이다. 아프간에 안정적인 신정권을 세워 놓지 않은 채 미국이 발을 빼버리면 아프간은 다시 내전의 온상, 테러리스트의 천국이 될 게 뻔하다.
따라서 미국은 탈레반 축출 후 아프간 국민의 지지와 함께 인접 국가 및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신정권 수립을 테러전의 2단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파월 장관의 아시아 순방은 이 같은 2단계 목표를 위한 첫 수순인 셈이다.
그러나 압도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1단계 군사작전이 손쉬운 승리를 거둔 데 비해 2단계 외교노력의 가능성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 외부 세력의 주도만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동시에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정권을 세운 전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구상하는 아프간 신정부의 구성의 원칙은 크게 2가지다. 첫째, 아프간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한 반군 북부동맹만으로는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형편이다. 현 탈레반 정권의 기반이며 아프간의 다수 종족인 파쉬툰족의 대표가 어떤 형태로든 참여해야 한다. 둘째, 인접국가의 이해 및 세력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파키스탄이나 인도, 이란 등 주변국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이 두 가지 모두 쉬운 과제는 아니다. 우선 파월 장관의 파키스탄 도착에 앞서 무샤라프 대통령은 군 지휘관 회의를 통해 북부동맹이 실질적 대표권을 갖는 아프간 신정권은 수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파키스탄은 전통적으로 파쉬툰족을 지원해 왔고 국내에 적지 않은 파쉬툰족이 거주하고 있어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게다가 북부동맹은 라이벌 인도와 이란 등이 후원하고 있다.
이에 대해 파월 장관은 “(아프간 신정부 구성에 관해) 어느 한 나라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며 파키스탄측의 요구를 일축했다. 벌써부터 이해 당사국간의 줄다리기가 시작된 셈이다.
파월 장관이 도착하기 직전, 인도군의 선제 포격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주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파월 장관은 출발 직전, 아프간 신정부 구성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다독이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 된 것이다. 게다가 파키스탄내 이슬람 과격파는 물론 정부 관리들조차 미국의 공습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주변국들을 다독이는 것은 그래도 쉬운 편이다. 1979년 이래 20년 이상 내전 상태를 이어온 아프간내의 다양한 세력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그야말로 지난한 과제이다.
신정부 구성에 관한 미국의 기본 구상은 지난 73년 퇴위한 파쉬툰족 출신의 전 국왕 자히르 샤(86)를 아프간 통합의 상징적 존재로 내세우고 아프간의 전통적 정치체인 로야 지르가(부족협의체)를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탈레반 축출 이후 국가 건설의 임무는 유엔이 떠맡는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파월 장관은 최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을 2차례 만났으며 리처드 하스 아프간 특사는 이달 초 망명지 로마에서 자히르 샤와 면담한 바 있다. 또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미 정보기관들은 북부동맹 등 아프간 내의 다양한 정치세력들과 접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 92년까지 아프간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현재 북부동맹의 지도자인 바하누딘 라바니는 최근 잇따른 인터뷰를 통해 전 국왕 자히르 샤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인접국 이란 역시 파쉬툰족 출신의 전 국왕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다.
보다 더 큰 문제는 북부동맹 자체가 동질적이거나 규율이 잡힌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4-10개 군벌의 연합체인 북부동맹은 상황전개에 따라 얼마든지 이합집산할 가능성이 높다.
아프간 사정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아프간의 복잡한 종교.인종적 다양성을 보고 있노라면 보스니아는 그래도 동질적인 집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실토할 정도다.
과연 미국은 이처럼 복잡다기한 아프간 국내외 상황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며 국제적 공인을 받는 정권을 창출해 낼 수 있을까. 미국의 아프간 공습에 앞서 프랑스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노암 촘스키,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은 ‘무력 보복은 미국을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악마의 덫에 빠뜨리려는 빈 라덴의 계략에 넘어가는 꼴’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어쩌면 미국은 출구 없는 피의 보복전에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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