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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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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과 북한

‘속았나, 속였나’
최근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두고 여와 야가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지난 8월 4일 러시아를 방문중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러시아측과의 공동성명 제 8항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한 데서 설전은 비롯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으로부터의 미군 철수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로 된다는 입장을 설명하였다. 러시아측은 이 입장에 이해를 표명하였으며 비군사적 수단으로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야당인 한나라당은 지난 해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주한미군의 주둔을 양해했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귀국 보고와는 차이가 있지 않느냐며 김 대통령이 북한에 속은 것인지, 아니면 한국 국민을 속인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고 다그쳤다.
행인지, 불행인지 여야간의 설전은 2,3일만에 아무런 결론없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직결된 사안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래야 이번과 같은 소모적인 정쟁을 피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위해 남과 북이 건설적인 노력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우선 이번 공동성명과 관련해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들은 ‘주한미군 철수’가 북한의 공식 입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은 주한미군이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지적한다. 북한이 이번에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한 것은 대미 협상용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세종연구소의 이종석 박사는 아직은 ‘주한미군 철수’가 북한의 공식 정책이라면서 “미국이 클린턴 행정부 때처럼 평화관계 정립의 방향으로 정책을 구사한다면 궁극적으로 북미관계 정상화 후에도 미군 주둔을 용인하겠지만 지금처럼 부시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적대시 정책’을 구사하는 한 공식 이데올로기인 미군 철수를 강하게 주장하겠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그는 92년 이후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겠다’는 북한측 관리들의 비공식 발언들이 나왔지만 이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 북한과의 평화관계, 나아가 북미관계 정상화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같은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언제든지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에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부시행정부가 ‘북한’을 한반도 및 동북아의 위협요인으로 지목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주한미군’이야말로 한반도 및 동북아의 위협요인이라고 맞불을 놓았다는 것이다. 또 미국이 북미협상 재개의 조건으로 북한의 재래식 무기 감축을 내세우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서동만 교수(상지대)도 “북한은 적어도 클린턴 행정부 하에서 페리 프로세스라는 이름으로 북미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은 공식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 분제의 상호 양해가 이루어졌고 작년 10월 조명록-올브라이트 사이의 북미 공동 코뮤니케 합의 과정에서도 이에 관한 이해가 있었다”면서 “이번 북러 공동성명의 군사조항은 부시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초래한 반작용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통일과 관련된 남북 관계 항목(제 7항)이 아니라 동북아 및 한반도 평화와 관련시키며 북미, 북일 관계 등 대외 관계 항목에 포함시킨 것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이는 대미 협상용이지 대남 협상용은 아니라고 해석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줄곧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주한미군에 대한 븍한의 공식 입장은 몇차례 변화를 겪었다. 우선 휴전협정 직후인 1954년에는 미군의 즉각적 전면적 철수를 요구했다. 이어 1974년에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미군의 즉각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87년에는 단계적 군축 실현과 남북한 미국 다국적 군축 협상안을 제시하면서 처음으로 3단계 철수안을 내놓았다. 88년 11월에는 포괄적 평화방안의 하나로 미군 무력의 단계적 철수안을 제시했는데 1단계 미 지상군의 부산 진해로의 후방 이동, 2단계 지상군 철수, 3단계 해군 및 공군 철수로 이루어져 있다. 90년에는 남북 군축에 상응하는 비율로 미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92년에는 통일 전까지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고 통일 이후에 주한미군이 단계적 점진적으로 철수하는 안으로 바뀌었다.

주한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북한측 관리의 발언이 처음 언론에 보도된 것은 지난 92년 6월이다. 그 해 6월 24일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은 북한의 한 고위관리가 “통일 전에 남북한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은 통일 후에도 존중돼야 하며 필요하다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인정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 관리는 당시 대일 수교 교섭의 북한 대표인 리삼로 군축평화연구소 고문으로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일보의 아시아조사회, 마이니치신문,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등 민간단체들이 개최한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통일에 관한 6개국 회의에서 이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마이니치는 북한의 고위관리가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계속과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북미간 관계 개선의 큰 장애물중 하나가 제거됐다고 논평했다.
마이니치 신문 보도는 다음날 국내 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당시 국내의 한 신문은 리삼로의 발언이 학술회의에서, 군축평화연구소라는 민간단체 대표 자격으로 행한 비공식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가 외교부 부부장이기도 하다는 점에 북의 결정적 정책변화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보다 약 5개월전인 92년 1월, 주한미군의 주둔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밝혔다. 92년 1월 22일 뉴욕에서 개최된 북미간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김용순이 아놀드 캔터 미 국무부 정무 담당 차관에게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하며 연방제 통일 후에도 동아시아 안정을 위해 필요할 경우 단계적 철수도 가능하다는 방침을 전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삼로 발언이 보도된 지 열흘 후인 7월 5일, 마이니치 신문에 의해 처음 보도됐다. 이 신문은 미 고위관리의 말을 빌어 미국은 이 발언을 북한이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전제로 한 계속 주둔을 처음 공식 인정한 것으로 이해했다고 전했다. 김용순과 캔터간의 뉴욕 회담은 한국전쟁 후 최초의 북미간 고위급회담이었다. 미국이 회담에 응한 것은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북한은 핵사찰을 빌미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노렸다. 3시간동안 진행된 회담의 분위기는 매우 딱딱했다고 한다. 양측 모두 자신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형식이었다. 캔터 차관은 미 정부기구들이 사전 조율한 입장을 그대로 전했다. 북한이 핵 투명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는 거의 밝히지 않았다. 또 북미간 고위급 회담은 이번 한번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김용순도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 위협 중지, 남한으로부터 미국 핵무기의 철수 등을 요구했다. 그리고 북한은 주한미군의 주둔을, 심지어 통일 후에도 용인한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공식 회담이 끝난 후 1시간 가량의 비공식 간담에서 김용순은 캔터에 대해 회담 결과의 공동성명 발표, 또는 북미 고위급 회담의 지속 등을 졸랐으나 캔터는 일체 응하지 않았다. 그 해 여름 김용순은 고위급 회담 재개를 요구하는 서한을 수차례 보냈으나 캔터는 “한번 회담은 한번 회담일 뿐”이라며 회담 재개에 응하지 않았다.
북미간의 첫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인정하겠다고 공식 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 주한미군 철수라는 북한의 오랜 공식 입장을 포기할 수도 있음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 국무부내의 일부 분석가들은 91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때부터 이같은 입장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국무부 정보조사국의 분석관인 로버트 칼린과 존 메릴은 그동안 ‘하나의 조선’ 정책을 견지해 왔던 북한이 남한과의 동시 유엔 가입을 받아들인 것은 ‘단순한 전술 변화가 아니라 장기적인 의미를 갖는 중대한 정책 변화’라면서 ‘아마도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오랜 요구보다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점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북한 핵프로그램의 동결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미국의 정책 담당자들은 이같은 분석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고위급 회담에 관여했던 찰스 카트만은 “미국 정부는 이 회담이 북한의 핵안보에 관한 것이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남한 배치 미 핵무기의 철수와 북한에 핵안전보장이 의제의 전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카트만은 북한이 미국과의 정치 경제 관계 개선이 자신들의 안보의 원천이라고 생각한 반면 미국은 이같은 측면에 거의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서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잘못 알았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다”고 말했다.
북미간의 첫 고위급 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냈다. 북한은 회담 8일 후인 1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에 가입했으나 의회격인 최고 인민회의는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 특히 92년 6월에 북한이 IAEA에 제출한 폐연료 샘플을 분석한 결과 북한이 신고량보다 더 많은 폐연료를 재처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북미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북미의 고위 관리가 다시 머리를 맞댄 것은 북한의 핵확산금지기구(NPT) 탈퇴 시한이 임박한 93년 6월에 들어서였다.
북한이 주한미군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은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가 타결된 94년 10월 이후였다. 북한은 95년부터 정전협정의 전환문제를 들고 나왔다. 북미간의 궁극적 관계 정상화를 상정한 제네바 합의가 타결된 만큼 양측을 적으로 규정한 정전협정은 새로운 평화체계(new peace mechanism)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측 논리였다. 북한측 주장의 골자는 주한미군과 북한군의 대표로 북미 상호안보협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협의체가 가동되는 시점에서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지난 92년 설치키로 합의한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시키자는 것이었다. 북한과 미국, 남한과 북한의 군 대표로 각각 협의체를 만드는 이중구조의 평화보장안이었다.
북한은 이같은 잠정적 평화보장안을 95년 9월 북한을 방문한 미 언론인 셀릭 해리슨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북한측 수석 대표였던 리찬복 장군은 9월 28일 해리슨과 가진 4시간여의 면담에서 북미, 남북간의 두 군사협의체는 비무장지대에서의 우발적 군사 충돌을 예방하며 나아가 군축 및 신뢰구축장치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자신이 새로운 평화체계의 구축에 참여할 경우 우리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아시아 전략상 미군이 당장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미군 철수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군이 남한에 무한정(indefinately) 주둔할 것이라는 상호 이해의 바탕 위에 새로운 평화체계를 세우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리슨은 당시 리찬복 장군이 정전협정과 유엔사령부가 새로운 평화체계로 대체된다면 부한은 미군의 남한 주둔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당시 북한의 한 핵심 관리가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조선반도는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열강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미군 철수가 이 지역의 세력균형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리는 “만일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일본은 금세 재무장할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공식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겠지만 이는 진심이 아니다”라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해리슨은 새로운 평화체계를 통해 북한이 노렸던 것은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라고 분석했다. 북한의 남침 저지가 이제까지 주한미군의 역할이었다면 새로운 평화체계에서는 군사적 현상 유지의 바탕 위에서 남북관계의 안정화에 기여해 달라는 게 북한측의 주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강석주 외교부 제1 부부장은 해리슨에게 “새로운 (평화) 구조는 남에 대한 북의 침공이든, 북에 대한 남의 침공이든 평화에 대한 어떠한 위협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해리슨에 따르면 북미간 상호 안보협의체 창설을 먼저 제안한 것은 미국측이었다고 한다. “1995년 5월 19일 미국이 북한측에 대해 양측 군 실무자간의 협의를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고 북한측 인사들의 말을 빌리면 미국은 추후 장성급 접촉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의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지난 9월 12일까지 10차례 영관급 실무회담이 열렸으며 그 결과 지난 9월 21일 양측간 장성급 회의를 갖기로 잠정 합의, 미군측 군사정전위 미군측 대표인 넬스 러닝 공군 소장이 내정됐다고 합니다. 양측 대표와 구성 인원, 회의 절차까지 포함돼 있는 잠정 합의문을 이찬복이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일 회의 석상에 미군 장성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는 한국 정부의 방해공작 때문이었을 거라며 이찬복은 분개했습니다.” 당시 개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은 이양호 국방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북미 장성급 회담 개최 방침을 통보했으나 한국측이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고 한다. 미국은 두 달후인 11월말게 미군 정보계통의 예비역 준장을 평양으로 들여보내 이하일 노동당 군사부장과 비밀 접촉을 가졌다. 한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양측은 미군의 주요 관심사인 미군 유해 송환 문제와 양측 군부의 향후 역할 조정 및 경제협력 문제 등을 논의했다고 한다. 분명히 미국은 북미간 군사접촉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96년 1월 미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 커트 캠벨은 한국 국방부 고위 당국자에게 보낸 서한에서 “북미 장성급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정책 재검토 작업이 긍정적 결과가 되게 도와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한편 이찬복이 해리슨에게 설명한 북미, 남북 군사협의체 동시 설치 방안은 1996년 7월 18일 북한을 방문한 미 국무부 관리 케네스 퀴노네스에게 공식 전달됐다. 그러나 북미간의 관계 개선 조짐은 96년 9월에 발생한 북한의 동해안 잠수정 침입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북미 관계는 98년 초 금창리 핵 의혹, 그리고 그해 8월의 인공위성 광명성 1호(미국 등 서방에서는 대포동 미사일로 지칭) 발사 등으로 대치 상태로 치달았다.
1999년 윌리엄 페리 대북 조정관에 의한 미국의 대북정책 전면 재검토와 그의 방북 등으로 북미 관계는 해빙 무드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해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남북 및 북미 관계는 중대한 전기를 맞는 듯이 보였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현실적으로 당분간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했고 김정일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김 대통령은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상회담 직후인 6월 30일 재미 언론인 문명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미군더러 나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당장 나가겠습니까. 우선 미국 스스로가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들은 분단에 책임이 있는 만큼 통일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날 닉슨도, 카터도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는데, 주한미군 문제는 우선 그들 스스로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방향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한편 이번 북러 공동성명으로 국내 정국이 시끄러워졌을 때인 지난 8월 7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KBS와의 특별회견에서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도 주한미군의 주둔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회견에서 “94년 핵위기 중재를 위해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주한미군의 존재는 한반도 지역의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서 “북한군과 한국군, 주한미군이 병력을 감축하고, 미군은 한국에 주둔한다는 것이 김 주석의 약속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김 주석 사망 두달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에게 보낸 친서를 통해 “김 주석이 약속한 사항을 모두 실행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제까지 북한이 주한미군의 주둔을 인정한다는 방침을 공개적·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북한측 관리들은 1992년 이후 주한미군을 용인한다는 의사를 비공식으로나마 여러 차례 밝혀 왔다. 그리고 그 발언의 배경에는 언제나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자신의 생존과 안보가 보장된다면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용인하겠지만 그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철수’라는 공식 입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주한미군 철수’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북한측의 협상 카드인 셈이다. 한국국방연구원의 서주석 박사는 “북한의 기본입장은 주한미군 철수”라면서 “그러나 이는 북한측의 희망사항일 뿐, 미군 철수가 관철되지 않을 것임을 내심으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북한은 대미 협상의 진전과 상황에 따라 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계속 활용할 것이며 대미 관계 개선이라는 궁극적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결코 이 카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이 북러 공동성명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뒤바꾼 부시 행정부의 정책 변화가 초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현재와 같은 대북 적대시 정책을 견지할 경우 북한은 러시아 중국 등과 함께 계속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표면적 입장 변화(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한국 정부의 탓으로만 돌려 책임 추궁을 하는 것이 과연 생산적인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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