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 상황에도 환자는 병원 사정에 따라야 한다?
기석이가 상계백병원 응급실을 찾았을 때는 2011년 12월 2일이었다. 학원에 가던 기석이는 심한 두통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빠는 인근에서 가장 큰 상계백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17시 50분께 병원에 도착한 기석이는 이내 따라온 아빠에게 별다른 이상 없이 자신의 증세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구토한 뒤 정신을 잃었다.
의료진은 급하게 기도 삽관 등 응급 처치를 하고 18시 23분 CT를 촬영했다. 병명은 '뇌동맥류 파열에 따른 뇌출혈'이었다. 의료진은 수술팀에서 내려와 어떤 수술을 진행할지 논의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경대퇴 동맥혈관 촬영술' 실시 후 '코일색전술'을 실시할 것이라던 의료진은 20시 10분경 지금이 아니라 3일 후에나 수술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 기석이는 10km 단축 마라톤에 참가할 정도로 건강한 아이였다. ⓒ김태현 |
다급한 가족들은 전원해도 되는지 문의했고, 의료진은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중앙대학교병원에 사정을 설명하고 이보다 빨리 수술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다행히 중앙대학교병원에서는 다음날 오후 1시에 수술할 수 있다고 했고, 가족은 상계백병원 담당 의사와 중앙대학교병원 의사를 서로 통화하도록 해 전원을 결정했다. 가족들은 의료진끼리 통화한 결과, 전원할 수 있다고 전해 들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구급차는 한눈에 봐도 너무 낡고 오래돼 보였다. 앞에는 운전사와 아버지가, 뒤에는 기석이와 레지던트 한 명이 탑승했다. 중앙대학교 병원까지 걸린 거리는 35km, 시간은 채 30분이 안 됐다. 시속 100km를 넘나드는 속도를 낸 구급차는 심하게 요동쳤고 아버지는 운전사에게 덜컹거리지 않게 조금 천천히 가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중앙대학교병원에 도착한 기석이는 한눈에도 상계백병원 때보다 상태가 훨씬 안 좋아 보였다. 의료진은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다시 CT를 촬영했고, 23시 30분경 바로 응급 수술을 했다. 의료진은 이튿날인 3일 13시에 수술하기로 했다.
이튿날인 3일 오전 10시경, 가족은 수술을 4시간 앞뒀다면 이것저것 서류에 사인할 것이 많은데 아무런 조치가 없자 중환자실 벨을 눌렀다. 그리고 밤새 기석이 상태가 너무 나빠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특히 동공이 8mm가 열리면 뇌사로 판정되는데, 기석이는 벌써 7mm가 열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수술만 잘되면 동공이 돌아오는 줄 알았지만, 의료진은 수술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전했다. 뇌사에 빠졌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천사 같은 아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암에 걸린 어머니를 둔 친구가 삐뚤어지지 않게 하려고 매일 친구를 집에 데려와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던, 엄마의 직장 일을 돕기 위해 전단 아르바이트도 마다치 않던 아들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가족을 모아 장기 기증을 통해 기석이의 삶이 이어지도록 결정했다. 아픈 기석이는 다시 한 번 구급차를 타고 서울성모병원으로 가서 심장과 간, 폐, 췌장과 두 개의 신장으로 새로운 이들에게 건강한 삶을 되찾아 줬다.
가족들은 기석이가 왜 뇌사에 빠져야 했는지 아직도 모른다. 3일 동안 기다렸어야 했는지, 전원해서 바로 수술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기석이의 죽음에는 몇 가지 물음표가 떠오른다.
▲ 기석 군의 아버지 김태현 씨가 지난 10일 환자단체연합회가 개최한 '환자 샤우팅 카페'에서 기석군의 마지막 18시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
첫째, 과연 서울 동북부 지역과 의정부 주변 지역의 유일한 3차 의료기관인 상계백병원이 응급 수술을 진행할 수 없었던 '시스템과 협진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3일 후 수술이 진행된다면 왜 의료진은 그간에 어떠한 조처를 할 것이고, 그로 인해 3일 후 수술해도 괜찮다는 설명을 하지 않았을까?
둘째, 응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계백병원이 수술할 수 없다면, 왜 의료진은 응급 수술을 할 수 있는 다른 병원을 알아보지 않았을까?
셋째, 절대 안정이 필요했던 기석이가 과연 전원할 수 있는 상태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병원은 왜 가족에게 기석이가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등의 물음이다.
의료진 누구라도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며 현재 기석이의 상태가 이러해서 이러한 조치를 할 것이고, 그 상태라면 3일 후 수술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면 가족들은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옮기기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응급 상황의 사례는 기석 군만의 일은 아니다.
갈 곳 잃은 응급 환자, 의료진은 타박만…
▲ 이지혜 씨는 "저희 어머니는 '메디시티'라는 대구에서 수술받을 병원을 찾지 못해 택배 물건처럼 병원 네 군데를 돌고 돌아 겨우 수술을 받으실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
하지만 경북대병원에서는 "전산에 문제가 있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요구했다. 가족은 결국 사방팔방 수소문한 끝에 급하게 굿모닝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 후 자료가 없다며 CT 촬영을 한 의료진은 "단순한 뇌출혈이 아니라 뇌동정맥기형성"이라며 굿모닝병원에서는 수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 씨는 다시 영남대 병원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수술을 받았지만,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고 있다.
강구화 씨의 딸 이지혜 씨는 "응급 환자를 침대에 눕혀놓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자신들은 수술할 수 없다는 단 한마디 말로 환자를 이리저리 택배 보내듯 짐짝 취급했다"며 "전원할 때도 환자가 있는 병원의 구급차로 바로 옮기지 않고, 이동할 병원의 구급차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며 눈물로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이지혜 씨는 "경북대병원으로 옮기던 중 전산상의 문제가 있어 수술을 못 한다고 연락받긴 했지만, 너무 늦게 연락을 받아 이미 병원에 도착해버린 환자와 가족에게 의사는 '수술할 수 없다고 했는데 왜 왔느냐'고 타박했다"며 "그 의사의 모습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상처"라고 말했다.
응급실 이용자 37.5% 최초 진료자 누군지 몰라
정부는 1994년에 응급의료법을 제정하고, 지역별 응급 의료기관을 지정하며 응급 의료 체계를 정비하는 등 응급 의료의 질적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오고 있다. 특히 2012년 8월 5일부터는 야간과 휴일에 응급 환자를 당직 전문의가 직접 진료하도록 하는 내용의 응급의료법을 개정·시행하고 있다.
▲ 응급실 최초 진료 의사, 최초 의사의 진료까지 대기 시간, 응급실 이용 만족도. ⓒ'병원 응급실 이용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한국소비자원, 2013. |
하지만 한국소비자원이 2012년 12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응급실에 도착한 후 최초로 진료한 의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응답이 375(37.5%)로 가장 많았다. 최초 의사의 진료까지 대기 시간은 10분 이내가 28.2%로 가장 많았으나, 90분 이상도 7.1%에 달했다. 응급실 이용 만족도에 대해서는 보통이라는 응답자가 56.9%(569명), 불만족하다는 응답자가 23.3%(233명), 만족한다는 응답자가 19.8%(198명)로 나타났다.
응급 의료의 혁신은 가능한가?
최근 보건복지부는 최상위 의료기관 전원 업무를 조정했던 1339의 역할을 대신해 '24시간 전원 조정 코디네이터' 시범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정부는 1339와 통합되면서 인력과 장비가 이관된 '119 구급 상황 관리 센터'에서 병원 간 전원을 직접 조정할 수 있도록 소방방재청과 협의하기로 했다. 또 이러한 조치를 올해 하반기부터 시행할 수 있도록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4조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법 개정 전이라도 응급실에서 전원을 요청하면, 옮길 병원을 직접 조회할 수 있도록 119에 '응급 의료 상황판 관리자 자격'을 제공해 당직 전문의의 연락처를 열람할 수 있는 '핫라인'도 개설할 계획이라고 했다.
홍정익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과 사무관은 "'24시간 전원조정 코디네이터'는 병원끼리 진행하던 응급 환자의 전원을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원할 수 있는 병원을 끝까지 찾아 최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처음에는 지역 내 시스템을 구축하고, 더 나아가 지역 내로 전원할 수 없으면 타 지역으로도 전원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응급(應急)은 '급한 대로 우선 처리함, 급한 정황에 대처함'이라는 뜻이 있다. 응급치료라는 것은 '갑작스러운 병이나 상처의 위급한 고비를 넘기기 위해 임시로 하는 치료'라는 의미다.
환자가 의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다. 환자가 현재 어떠한 상태이며, 어떠한 치료를 받고, 가족은 어떠한 조처를 해야 하는지, 의사의 입장이 아니라 환자와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위급한 상황에 부닥친 환자와 보호자는 모든 것이 답답하고 궁금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어 그 어느 때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며 "응급 상황일수록 환자와 보호자가 상황을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더 명확하고 알기 쉽게 상황을 전달할 수 있는 '응급실에서의 환자 및 보호자 설명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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