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도쿄올림픽에 신금단이 북한대표팀으로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남한의 아버지 신문준은 도쿄로 날아간다. 신문준은 한국전쟁 1.4후퇴 때 13살 어린 딸, 신금단을 두고 월남했다. 기약 없는 부녀의 상봉. 북한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63년 가네포(GANEFO, The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참가선수에 대해 올림픽 출전 금지 조치를 취하자 올림픽 불참을 선언하고 선수단 철수 결정을 내렸다.
북한선수단 철수 당일, 남북의 극적인 합의로 부녀상봉이 이뤄진다. 14년 만에 얼굴을 맞댄 부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7분. 목멤에 말을 잊지 못한 7분이었다. 어린 딸을 두고 홀로 남으로 내려 온 아버지의 죄책감을 어찌 형용할 수 있을까? 신문준은 북한 선수단이 니카타행 열차를 기다리는 도쿄 우에노역으로 달려가 신금단을 다시 만난다. 그저 눈물만 흘러내릴 뿐이었다. 3분 뒤 신금단은 떠난다. "아바이, 잘 가오"란 말을 남기고.
한스 U. 굼브레히트는 자신의 저서 '매혹과 열광'에서 스포츠 관전은 가장 강력하고 대중적인 현대의 미적 체험이라고 했다. 인간의 몸과 극한의 고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굼브레히트의 '매혹과 열광'은 스포츠 미학의 완성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굼브레히트의 스포츠 미학도 한국체육 근현대 100년과 비교해보면 무언가 부족하다. 굼브레히트가 말한 매혹의 본질이 르네상스적 미학의 완성이라면 한국체육 근현대 100여년의 스토리엔 슬프고 서럽기에 찬란한, 눈물과 한의 서정까지 담겨있기 때문이다.
1932년 LA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들은 일장기를 달았기에 더욱 이를 악물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선 올림픽 출전을 위해 전시에 탈영까지 감행한 38따라지 강준호가 동메달을 따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북한의 리호준은 50m 소총복사 금메달을 따낸 뒤 "적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쐈습네다"라고 말했다. 서슬 퍼런 소감이었다. 망국의 한, 분단과 전쟁, 이념 대립, 엘리트스포츠 개발독재는 근현대사의 고난을 피해갈 수 없었던 한국스포츠의 역사다.
▲사라졌으리라 여겨진 이념대립을 되살리는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정대세를 쉽게 비판하는 건 온당한가. ⓒ뉴시스 |
29살 정대세의 삶은 '민족'과 '축구'의 오버랩이다.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다녔던 조총련계 민족학교, 월드컵 출전을 위해 선택한 북한 대표팀 그리고 분데스리가 FC 퀼른과 수원 삼성. 한국 국적의 아버지와 해방전 조선 국적의 어머니. '인민 루니' 정대세의 이력을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재일교포 3세 축구선수가 걸어온 길에 뿌려진 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질곡을 눈치 채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아 보인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갖고 북한 대표팀으로 뛰었던 정대세는 "나의 조국은 조선"이라고 말한다. 자이니치(재일동포) 디아스포라를 알고서도 정대세를 빨갱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해방 후 재일교포 70여년의 삶을 알고서도 정대세 추방을 얘기할 수 있을까?
재일교포의 삶을 다룬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의 영화 <박치기>를 보았을 때 가슴이 메인 기억이 있다. 그러나 2010년 남아공월드컵 브라질전에서 보았던 정대세의 눈물은 뜨거운 가슴이었다. 브라질전 정대세의 눈물엔 남과 북이 없었다. 이념은 더더욱 아니었다. 정대세는 스스로 재일교포 3세 축구선수의 눈물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올해 1월과 4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강종헌 씨, 고병택 씨가 누명을 벗었다. 2012년엔 재일교포 박박 씨가 대법원 판결로 28년 만에 간첩혐의에서 벗어났다. 엄혹했던 7, 80년대 독재정권은 재일교포의 특성을 이용해 재일교포와 조총련의 연계를 쉽게 조작했다. 혐의는 당연히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정대세를 두고 국가보안법 처벌을 주장하는 자들의 준동이 해프닝을 빚고 있다. 70년대 재일교포 간첩 조작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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