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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벼락 논란, 임찬규 선수만의 문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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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물벼락 논란, 임찬규 선수만의 문제 아니다

[배지헌의 그린라이트] '진정한 의식' 안착할 생산적 논의 필요

'세러모니(ceremony)'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의식이나 행사, 사교적인 의례' 등이다. 야구에서는 경기 전후에 갖는 공식적인 행사를 뜻하기도 하지만, 중요하고 극적인 장면이 나왔을 때 선수들이 기쁨을 표현하는 특유의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쓰인다. 특히 끝내기 홈런이나 안타 때 선수단 전원이 뛰쳐나가 그날의 '히어로'를 맞이하는 순간은 선수들은 물론 지켜보는 관중이나 시청자들에게도 짜릿한 쾌감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경기를 중계하는 방송사나 스포츠 매체에 좋은 '그림'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다.

방송 중계가 드물고 야구단내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예전에는, 선수들의 세러모니도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1년 126경기 중 한 경기를 이겼을 뿐입니다. 한번 성공했다고 지나치게 일희일비해서는 곤란하죠." 이정훈 한화 퓨처스팀 감독이 현역 시절을 회상하며 했던 말이다. 비교적 가까운 시절인 1994년을 돌아보자. 한국시리즈 1차전 연장 11회, 김선진이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을 때 LG 선수들은 몰려나가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으로 세러모니를 대신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자축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밋밋하고 어색하게 느껴져서, 홍성흔(두산) 같은 선수를 타임머신에 태워 보내 리액션을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약 20년이 지난 지금은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다. 프로야구는 모든 경기가 TV와 인터넷과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을 통해 중계되며, 선수들이 얼굴 근육을 조금만 찡그려도 고스란히 화면에 비친다. 여기에 기자석과 관중석에도 수백 대의 카메라가 가득하다. 선수들은 화면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일까. 요즘에는 정규시즌 1승 뒤에도 마치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승리 같은 세러모니가 나온다. 선수들은 홈런이나 적시타, 호수비와 같은 사소한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주먹을 부딪치거나 팔을 크게 휘두르기, 점프해서 엉덩이를 부딪치기, 손가락 하이파이브 같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요란하게 축하를 나눈다.

수위도 갈수록 높아진다. 어지간한 행동을 해서는 튀지 않기에, 다양하고 창조적인 방식의 세러모니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홈런 친 선수를 구타하는 것은 기본이고 날아차기, 얼음 뿌리기, 발로 밟기 등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페트병에 담긴 물을 붓는 '유아세례' 수준이었다가 생수통을 통째로 뿌리는 단계를 거쳐, 최근에는 아예 양동이 가득 물을 담아 '물벼락'을 쏟아 부을 정도다. 이제는 덤덤하면서도 의기양양한 기쁨의 표현이 오히려 파격적인 모습으로 느껴질 정도다.

▲월요일을 뜨겁게 달군 문제의 장면. 지난 26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3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 LG 임찬규가 끝내기 안타를 날린 정의윤에게 과도한 물세례를 했다. ⓒ뉴시스

야구가 없는 월요일(27일)을 뜨겁게 달군 '임찬규 물벼락 논란'도, 따지고 보면 최근 프로야구의 세러모니 과잉 양상이 발단이다. 이 해프닝은 어느 방송 관계자의 오만한 발언처럼 임찬규가 '인성교육이 필요한' 문제 선수라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요즘 야구선수들은 다들 경기 때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축하를 나누고 있고, 다소 과격한 세러모니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다. 물벼락 조준에 실패한 선수가 임찬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임찬규도 선배들이 시키니까 양동이를 들고 다가갔을 테고, 남들 다 하듯 별 뜻 없이 물을 끼얹었을 것이다.

비난은 잘못한 만큼만 받아야 한다. 장난도 적정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비난 역시 마찬가지다. 애꿎은 아나운서에게 물벼락을 맞게 한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지만, 한낱 방송사 관계자에게 야구인 전체가 모욕적인 말을 들을 만큼 죽을죄를 진 것은 아니다. 인터넷 연예 매체에서 수백 개의 기사를 쏟아내며 신나게 까고 부술 만큼 심각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이런 매체는 여성 아나운서와 야구선수가 관련된 일이 생기면 더욱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경향이 있다). 선수가 피해를 입은 아나운서에게 정식으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끝낼 일이, 여기저기서 말을 보태고 부채질하는 통에 물벼락에서 쓰나미 수준으로 덩치를 키웠다. 승리 세러모니의 적정선을 놓고 충분히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갈 수 있는 일이, 어린 선수 하나에 대한 조리돌림과 야구계-방송계 간의 감정싸움으로 전이됐다.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지엽적인 논란만이 남았다.

사실 물벼락 사건 이전에도 프로 선수들의 경기 후 뒤풀이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 지는 꽤 오래됐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입니다. 야구장이 아니라 시장 바닥을 보는 것 같다니까요." 지난해 만난 한 야구인의 얘기다. "물론 젊은 선수들이 자기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프로야구 선수로서 어느 정도 지켜야 할 품위도 있는 것 아닙니까? 홈런 친 선수를 발로 차고 두들겨 패고, 생수통에 쓰레기통까지 들고 나와 경기장에 뿌려대고… 기쁨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프로라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도 알아야죠. 언제부터 야구장이 이렇게 됐는지…."

단지 외부에서 보기에 볼썽사납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야구인은 "지나치게 자축하는 것도 상대를 무시하는 행위"라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상대도 경기장에서 땀 흘려 최선을 다해 플레이하는 선수들입니다. 패자라고 해서 무시당하면 곤란하죠. 경기장에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너무 우쭐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시즌 중 한 경기를 이겼다 뿐이지 한국시리즈 우승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야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한 경기 이겨놓고 지나치게 기쁨에 겨워 주체 못하는 것도 보기에 우스운 일입니다."

서울 팀을 응원하는 한 야구팬은 "선수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긴 하지만,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도 있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수위 조절 면에서 아슬아슬해 보일 때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령 쓰러뜨려놓고 발로 밟는 광경을 보면 '저러다 손이라도 밟는 것 아닌가' 싶어 흠칫 놀라게 되죠. 발로 차거나 구타하는 모습을 보면 철없는 고등학생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 왜 있잖아요. 교실에 보면 일부러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 눈에 띄려고 하는 친구들이요. 물론 야구팬 중에 재밌어 하는 사람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고려했으면 합니다."

성인야구 선수들의 모습에서 고등학생을 연상한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프로 선배들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행동을 아마추어 학생 선수들이 고스란히 따라 하기 때문이다. "애들이 프로야구에서 좋은 걸 배워야 하는데, 자꾸 겉멋이 들고 안 좋은 모습을 배우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아마추어야구에서 오랜 기간 지도자로 활동한 야구인의 말이다. "흐린 날에 최고급 선글라스를 끼고, 눈 밑에 아이패치 붙이는 건 그러려니 합니다. 하지만 더그아웃에서 마구 춤추면서 날뛰고, 점수가 날 때마다 3루 베이스 근처까지 우르르 몰려나와 난리를 피우는 건 도무지 그냥 보기 힘들어요. 학생 선수들에게 야구장은 교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로서 기본적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배워 익히고, 상대를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죠. 지도자들이 이기는 기술은 가르치면서 왜 그런 기본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 고교야구 경기에서는 더그아웃에서 팀원들끼리 즐거워하고 결속을 다지는 수준을 넘어선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마구 괴성을 질러대고, 상대 선수를 모욕적인 말로 야유하고, 더그아웃 앞으로 뛰쳐나와 춤을 추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끝내기 승리 때는 프로처럼 생수병과 아이스박스가 운동장에 쏟아져 나올 때도 있다. 패한 상대팀은 퇴장 전에 상호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물을 뿌리면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광경을 본 적도 있다. 물론 심판원들이 경고를 하긴 하지만(대한야구협회 경기진행규정에는 '학생선수로 어긋난 행동을 금지하며 1차 경고, 재발 시 퇴장 조치된다'는 조항이 있다) 5분만 지나면 금세 잊어버린다. "감독이나 코치가 나서서 자제시켜야 합니다. 선수들 기를 죽인다고 방관할 게 아니라, 수시로 주의를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곳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고교 선수들은 프로 선배들의 과격한 세러모니를 보고 따라하고, 그렇게 몸에 밴 버릇은 나중에 프로 선수가 된 뒤에도 계속 유지된다. 악순환이다. 이런 문제가 계속 지적되자 한국야구위원회(KBO)가 2011년 1월 11일 '끝내기 홈런 및 안타 후 과도한 환대행위(물통, 쓰레기통, 헬멧 등으로 때리는 행위)'를 금지하는 지침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논란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는 했지만, 이번 '물벼락 사건'을 계기로 해서 선수들과 야구계가 승리 세러모니의 적절한 선을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선수들과 관중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프로선수다운 품위를 지키기 위한 선이 어느 정도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선수들이 자체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지키고, 잘 되지 않을 때는 코칭스태프나 고참급이 나서는 것도 방법이다. 또한 학생야구에서도 선수들이 프로야구의 무분별한 모방을 자제하고 학생다운 기본을 지키게끔 지도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프로는 프로다운 품위를 지키고, 학생은 학생다운 야구를 하면 됩니다. 의외로 간단한 문제에요." 프로 구단 스카우트의 얘기다.

영단어 '세러모니(ceremony)'에는 '의식, 의례'라는 뜻 외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다. 공식적으로 거행되는 '엄숙한' 행사를 뜻하기도 하고, '겸손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동안 프로야구에서 나온 세러모니들은 단어가 원래 가진 뜻과는 영 거리가 멀었던 게 사실. 단지 프로야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프로야구를 이끌어갈 아마추어 선수들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반드시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야 한다. 프로야구가 진정한 프로다운 품위와 지혜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미국프로축구협회(NFL)의 스타 플레이어 버드 그랜트가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은, 야구에도 해당된다.

"터치다운을 해냈을 때, 나는 항상 있던 일이라는 듯이 공손히 럭비공을 주심에게 돌려주곤 했습니다. 그런 게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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