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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김상수 칼럼]<120> 자연, 시간, 인간


세계 사진 거장 KARSH(카쉬) 재단의 2010년 사진 작품 대상을 받다

터키령(領)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태어난 유섭 카쉬(Yousuf Karsh, 1908∼2002)는 인물사진을 찍은 세계적 명성의 사진작가로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졌다. 처칠과 테레사 수녀, 그리고 오드리 헵번 등 수많은 유명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작가가 바로 그다. 카쉬는 미국에 '카쉬예술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에서 첫 번째로(2010년) 수여하는 사진작품상을 받은 미술작가가 한국인 미술작가 윤성원이다.

나는 한 미술작가의 성장을 본다

지금부터 만 8년 전인 2003년 한 젊은 미술작가의 첫 전시 카탈로그에 나는 글을 썼다. 당시 그 글의 제목이 "한 젊은 작가의 등장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 사진작가 윤성원 ⓒ김상수
윤성원과의 만남은 2001년 봄 미술대학 대학원 학생들이 내 스튜디오로 찾아와 내가 그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특강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정녕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질문한 적이 있으며 우리 나날의 삶에서 의식의, 실재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 수 있는가, 그리고 미술 작업을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학생들 스스로 의문을 갖기를 주문했다.

그때 그 특강 며칠 후 몇 점의 에스키스와 그림물감이 덧칠해져 있는 스케치, 작은 유화 그림을 들고 나를 다시 찾은 학생이 윤성원이었다. 난 그때 그 학생이 보여준 작업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그 반가움의 정체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진솔하고 소박한 표현으로 지금 사람들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를 그가 미술의 대상으로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의 명백한 힘은 지금 위협당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대상과 소재는 바로 식물(植物)이었다. 그중에서도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속에서의 뿌리의 움직임과 뿌리의 형상들, 그리고 나무줄기와 나뭇잎의 변화, 그것의 연속적인 흔들림들, 이처럼 식물이 지니는 시간의 변화와 움직임에 대한 그의 시선은 차분했다"고 나는 글에서 얘기했으며 그 글에서 그의 미술은 "연속적인 이미지의 연결을 보여주고 있는 스케치들, 조금씩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다른 이미지의 연쇄성과 몽따쥬같은 흑백의 거칠고 꼼꼼한 점묘(點描)들. 이는 마치 나무뿌리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눈금 매기듯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회화적 표현을 말한다.

사실 뿌리는 땅속에 있으면서도 강력하고도 은밀하게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아울러 땅 밖으로도 나무에 줄기에 잎에 성장을 부추긴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림에서 강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무를 볼 때, 땅 밑에 나무의 뿌리에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게 마련이다. 나무의 겉모습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살랑거림과 출렁거림은 시선이 머물지만 그 밑에, 땅속에, 대지 속에, 근원적인 근거인 뿌리에 대한 상상은 이렇듯 작가의 눈에서만 자연스럽게 투시되고 있다"고 했으며 그의 미술은 특장(特長)은 "오늘날 사람을 포함한 생태(生態)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인 중요한 명제로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 삶의 근원을 뿌리째 흔들어 놓기 시작하는 온갖 문명의 부정적인 결과들과 행태들, 이것으로부터 식물의 명백한 힘은 지금 위협당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과 발견에서 그녀의 회화적인 출발이 있음을 보게 된다"고 썼다. (윤성원, 한 젊은 작가의 등장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

단순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으로의 윤성원 미술

▲ <Time Dimension,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3> ⓒ 윤성원

그리고 2005년 윤성원의 두 번째 미술전시 카탈로그에도 비평의 글을 썼다. 그 글에서 나는 "윤성원의 회화는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무엇일 수 있는가, 그 생각의 단서를 <나무뿌리>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윤성원의 메타포이지만 조금이라도 윤성원의 회화에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본다면, 이내 그녀의 회화적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으며 이는 나무뿌리를 통해서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젊은 화가의 역량이 더없이 소중함을 새삼 강조하게 된다.

오늘날 회화 또는 미술이 온통 상업적 소비의 무차별 경쟁 속에 빠져들어 기꺼이 소모되고 심지어 환금성(換金性)의 상품으로 팔릴 것을 안달하는 미술계 세태에서 한 젊은 작가의 뚜렷하고 집중적인 <나무뿌리>의 회화적인 관심과 표현은 참 대견한 것이다. 이는 생태적인 대상과 관심이란 회화의 주제적 측면도 있지만 질박(質朴)하고 단순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으로 진실하게 회화작업과 마주하고자 하는 이제 20대 후반의 이 젊은 작가의 정신은 이 땅의 미술 풍토에서는 상찬(賞讚)받아야 마땅하다.

자연의 위기, 사회적 인간적 위기

오늘을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이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임을 더 명확하게 볼 필요가 있으며 주위에 눈에 보이고 있는 여러 사실만으로도 우리 삶의 터전이 자꾸 붕괴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윤성원이 회화로 그리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地下)의 <나무뿌리>를 그녀가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역설이지만 '잘 보이지 않고 잘 드러나지 않는' 땅 밑의 생태를 통해 인간 생존의 터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은유에는 윤성원 회화를 통해서 거듭 <사람의 삶>과 <사람의 시선>을 새삼 일깨우게 된다. 이는 윤성원 회화의 힘이다.

예민한 촉수(觸手)로의 미술

▲ <Time Dimension,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4> ⓒ 윤성원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포함 세계인들 대부분은 지난 100여 년간 근대화 콤플렉스에 중독되어 경제발전과 계속적 성장이라는 미몽(迷夢)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예민하게 촉수를 세우고 세상을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 사회와 삶의 터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얘기를 왕왕 들을 수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기보다는 적당히 문제를 가리고 곡해(曲解)하여 문제를 더 희뿌옇게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비록 눈에 잘 띄지 않는 땅 밑에 있는 <나무뿌리>에 윤성원은 시선을 두고 있지만, 그 <나무뿌리>의 뻗어남과 엉킴과 끊어짐에서 자연의 절멸(絶滅)과 순환과 생기(生起)를 통해서 자연은 '강제하거나 외면하거나 왜곡(歪曲)한다'고 해서 그 자연성(自然性)이 결코 달라짐이 아니라는 역설(逆說)을 회화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임을

윤성원의 <나무뿌리>를 통한 시간의 경과와 채집은, 인간이 땅 밑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힘을 잃게 된다면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임을 암시하면서 우리들 삶은 만물과 서로 맺어져 끊임없이 삼투(滲透)하여 상관하며 관계한다는 자연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인식을 요청한다.

이처럼 윤성원의 자연의 <나무뿌리>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 밑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한다"고 나는 한국에서의 그의 두 번째 전시회(2005년) 카탈로그에서 말했었다.

세월이 흘러 2011년, 회화 그리고 사진

최근 나는 미국 보스턴에서 미술작업을 하던 윤성원이 일시 귀국해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 이제 그의 나이 만 33살이다.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내가 그를 만난 지 벌써 10년째다. 그동안 그는 '낯선 나라'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 가서 그의 미술작업은 더 넓어졌고 깊어졌다. 미국의 현대예술은 세계의 현대예술을 합종연횡(合從連衡)하는 예술일 것이다. 아마.(필자는 아직 미국을 가본 적 없다)

그 미국사회에서 윤성원의 미술작업은 크게 진전되어 그 성과로 2010년 카쉬재단에서 "Yousuf Karsh Prize in Photography" (Awarded by Yousuf and Estrellita Karsh) 아이슬란드를 찍은 사진으로 첫 번째 '카쉬 사진상'을 수상했다.

냉동과 충일

▲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1> ⓒ윤성원

그가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2009년 1월의 겨울 풍경 사진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은 내게 퍽 인상적으로 보였다. 엄청난 추위로 냉동된 아이슬란드에서의 겨울 풍경을 보면서도 마음의 온도는 거꾸로 충일(充溢)했다.

고대 자연이 숨 쉬고 있는 아이슬란드 겨울 풍경은 윤성원에게는 시간과 영원을 향한 물음에 안성맞춤이었을 풍경이었다. 아이슬란드 풍경을 찍은 그는 그의 사진에 대해 말하기를 "오랜 세월을 버텨온 아이슬란드의 설원은 변화의 역사, 시간의 중첩,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나타내는 변화를 지금의 절대 고요로 표출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지질학적 과정의 일시적인 동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사진으로 포착된 감성적인 구조를 통해 공간의 현상학과 형태의 기하학을 재현한다.

아이슬란드의 겨울 바다와 육지 표면의 반사 표면은 구름으로 가려지면서 고요하고 영원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나의 작품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중심에서 하늘의 고요와 땅의 고요는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의 일부가 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외부 세계의 통일을 증언한다"라고 말했다.

▲ <The two silences of heaven and earth, 2009-2> ⓒ윤성원

그리고 지난 여름(2010년) '아메리칸 아트'에서는 미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젊은 예술가로 활동하는 2명의 젊은 작가에게 심사를 거쳐 수여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장학금' 선정자로 윤성원을 선정했다. <Terra Summer Residency Fellowship / Terra Foundation for American Art 2010> (one of two American artist fellows) 그 장학금을 받은 윤성원은 프랑스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마치고 또다시 올해 초 아이슬란드로 다시 날아가 그 나라의 풍경을 새로 찍었다.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인간의 흔적

윤성원이 보스턴박물관에 전시된 6세기 중국조각품을 사진으로 찍은 것은 우연한 발견에서 그만의 작가의식으로 새로운 시간의 해석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보스턴박물관의 6세기 중국 조각 작품 사진은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는 고대의 시간을 현대의 시간에서 사진으로 그가 재포착한 것인데,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말하기를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아득한 과거에 만들어진 조각을 응시할 때, 나는 표면과 형태를 넘어선 시간의 새로운 차원을 볼 수 있으며, 보다 단단한 무언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명상을 통해 깨어나서 사물의 중핵(core)과 정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거의 지각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감지한다. 이 지점에서 모든 시간의 차이는 사라지며, 이러한 고요는 지각과 경험의 동시간대 통일을 암시한다"고 답한다.

꾸준한 젊은 미술작가의 생장(生長)을 지켜보면서

이 젊은 작가 윤성원(http://sungwonyunstudio.blogspot.com)의 생장을 지켜보는 나는 즐겁다. 더구나 꾸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예술작업을 밀고 나온 지난 10여 년 세월, 나는 그의 모습과 서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성실하고 일관되게 세상에 대한 자기인식에의 해석을 담아내는 그의 미술작업을 내가 확인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바로 가기 : www.kimsangso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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