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나는 그보다 조금 더 기대하기는 한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주요 대선 후보들이 앞다투어 '국민 통합'을 외쳐대던 상황을 떠올려 보라. 육지행선(陸地行船)이 따로 없다. 한국 사회가 "인종, 학력, 정치적 입장 등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로 변모"했다는 김한길 의원의 진단은 그보다는 '더 민주적'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의 대립, 정치적 갈등, 의미 투쟁의 가시화, 즉 서로 다른 현실 인식을 전제하지 않는 사회만큼 민주주의, 인권, 차별 감수성과 거리가 먼 사회도 없을 것이다.
인권과 자국민 보호의 차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기억에 남아 있는 여러 장면이 있다. 그중 인상적인 장면 하나는 바로 2009년도 전병헌 의원실에서 개최했던 인종차별금지법 입법 공청회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성폭력 등 온갖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인종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집단이 난입하자 공청회의 마지막은 거의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인종차별금지법도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지 않고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18대 국회에서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최근에 차별금지법 관련 자료를 찾다가 몇 년 전 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를 읽었다. 작년 12월 국내 언론들은 호주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한인 폭행 사건에 대해 인종차별에 근거한 범죄가 의심된다며 진정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첫 사건의 피해자는 '망할 놈의 중국인들'(Fucking Chinese)이라는 욕설을 들으며 집단 폭행을 당했다. 새누리당은 한인 사회의 불안을 우려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라는 논평을 발표했고, 샘 제러비치 주한 호주대사는 호주에서 인종차별은 인종차별금지법과 인종혐오금지법을 통해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으며 호주는 모든 이를 따뜻하게 포용하는 나라라는 글을 한 일간지에 기고했을 정도다.
▲박지성 선수. ⓒ뉴시스 |
이 남성이 박지성을 향해 '칭크(Chink, 찢어진 눈을 가진 동양계, 특히 중국인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를 끌어내라' 등의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해당 발언을 선수들이 직접 들었다면 심각한 충격을 줬을 것'이라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발언이 심했다', '유죄 판결은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한인 폭행 사건들이 아시아계 밀집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도 '인종차별에 근거한 혐오 폭력이 아니라 무차별 폭력'에 가깝다는 호주대사관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호주의 인종차별금지법이 유명무실하다는 내용과 함께 '시대착오적인 인종 범죄를 방치하면 야만국'이라는 사설을 뽑아내는 국내 언론의 '패기'에는 감탄사가 쏟아진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몽골 국적의 미등록 미성년자를 열흘 만에 수갑을 채워 추방하고, 20여개가 넘는 차별 사유 중 장애, 여성, 나이와 관련된 3개 개별 차별 금지 법령만을 가진 한국 사회의 '야만성'과 '후진성'은 어쩌면 좋을까?) 현실에서 인권은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같은 보편의 언어로만 이해되지 않지만, 인권이 '자국민 보호주의'와 다르게 소통되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우울할 뿐이다.
차별금지법, 있으나 마나?
흥미로운 점은 호주의 인종차별금지법의 실효성에 대해 비판하는 호주 언론의 기사들이 국내 언론에서도 번역되어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기소까지 이어진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기소 건수는 사람들이 차별 금지 관련법의 존재를 얼마나 인지하고 있으며 실제로 얼마나 활용하는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법의 실효성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다. 그렇다면 호주에서 차별금지법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2012년에만 500건이 넘는 인종차별 관련 제소가 인권위원회에서 처리됐다는 호주대사의 해명은 무엇일까?
호주에서 1975년에 인종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20년 후인 1995년에 인종혐오금지법이 보완적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인종차별금지법의 보호 범위를 확장하면서 고용, 재화, 용역, 서비스 등에서 이뤄지는 불평등 외에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욕설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혐오 발언을 형사처벌 하는 영국의 차별금지법을 예외로 둘 때,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국가들에서 차별 사건을 다루는 절차나 방법이 소송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사·민사소송 외에도 화해·조정·중재 등의 역할을 하는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대안적 분쟁 해결) 기구들이 준정부조직으로 기능하기도 하는데, 이때 판례만큼이나 조정례 역시 법의 역할과 실효성을 판단하는 주요 근거가 된다. (물론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입증 책임과 과도하게 엄격한 법 집행의 문제로 접수 건수에 비례해 기소 및 소송 건수가 적을 가능성이 높고, 권리 구제 절차는 어느 국가의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이슈다.)
현실은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국가라고 해서 모든 차별이 급격하게 감소하거나 해소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차별의 공적 가시화로 인해 사회적 분쟁이나 갈등, 차별 조장이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 '정상'이고 '수순'일 것이다. 그래서 '밤늦게 돌아다니는 아시아인이 문제다'라는 경찰의 발언도 공무집행 위반으로 사회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차별금지법의 효과와 의미는 처벌과 금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인권과 보호, 상식과 차별, 중심과 주변의 차이를 사회적 의제이자 논쟁거리로 환기시키면서 어떻게 그 거리를 좁혀나가는가이다.
혐오 발언에 대한 적극적인 형사처벌을 옹호하다가, 차별금지법이 있으나 마나 그 실효성이 담보되기 어렵다며 비판하다가…. 자아분열 수준의 한국 언론을 보고 있자면,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만을 발표하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일관성과 뚝심을 칭찬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흔히 하는 말로 '아'와 '어'가 다르고 심지어 '님'에 점을 찍으면 '남'이 되는데, 한국 정부는 언제쯤 차별금지법 존재 유무의 차이와 효과를 인지하고 제정 움직임을 보일까? "각종 법률에 인종을 이유로 차별하는 규정이 없고 어떠한 기준에 의하더라도 불합리한 차별 대우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고 이미 존재하는 차별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2007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심사에서 한국 정부가 한 답변이다.)
인권 정책 찾아보기 어려운 박근혜 정부
대선 전 박근혜 후보가 발표한 인권 관련 공약은 북한 인권 단 하나를 빼고는 전무했다. 그런데 당선 후 취임식에서는 '국민 행복'을 약속하며 "힘이 아닌 공정한 법이 실현되는 사회, 사회적 약자에게 법이 정의로운 방패가 되어 주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외치는 '국민 개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에게 방패의 역할을 해 주는 정의롭고 공정하게 실현될 수 있는 인권기본법인 차별금지법조차 없는 현실이다. 이미 3개의 차별금지법안들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고 법무부가 유엔 인권이사회의 '국가별 인권 상황 정기 검토(UPR)' 권고 사항을 수용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추진을 발표한 만큼,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만큼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3월 6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다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활동들을 해 나갈 예정이다.
▲ 박근혜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6일 기자회견 모습. ⓒ인권오름 |
"호주를 포함해 인종차별이 없는 곳은 없으며 법적·제도적 장치만으로 이를 방지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는 발언을 인종차별법과 인종혐오금지법이 존재하는 국가의 호주대사가 (자기 비판과 성찰의 의미로)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포괄적 차별금지법조차 없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 통합을 외치기에, 법치와 국민 행복, 정의와 공정함을 외치기에는 그동안 한 일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현실 인식' 정도는 하고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차별금지법, 통합보다 민주적인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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