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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예견된 참사', 한국 야구 민낯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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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WBC '예견된 참사', 한국 야구 민낯 드러냈다

[배지헌의 그린라이트] 한국 야구 위기…전화위복 기회 삼아야

기적은 없었다. 한국 야구의 '그랜드슬램' 꿈이 좌절됐다.

한국은 5일 대만에서 열린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1라운드 B조 예선에서 3대 2로 '패배 같은 승리'를 했다. 첫 경기 네덜란드전에서 0대 5로 패한 한국은 이날 대만을 반드시 6점차 이상으로 이겨야 2라운드 진출을 노릴 수 있었지만, 기대와 달리 경기 내내 대만에 끌려다니다 막판 강정호의 역전 투런포로 간신히 1점차로 이기는데 그쳤다. 9회 마무리로 등판한 오승환은 팀의 탈락을 확정짓는, 야구 인생에서 가장 착잡한 세이브를 거뒀다.

이로써 한국은 2승 1패 동률을 이룬 세 팀(네덜란드, 대만, 한국) 간의 TQB(Team's Quality Balance)에서 3위로 밀려나 일본에서 열리는 WBC 2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이번 대회에서 최소 4강, 최대 우승까지 노리던 한국 야구로서는 2006 '도하 참사'에 이은 '타이중 참사'라 할 만한 결과를 맞았다.

여기서 승자승 대신 팀 간 득실차를 따지는 WBC의 독특한 대회 규정 탓을 하기는 어렵다. 어차피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 조건에서 대회에 임했고, 한국이 규정을 모르고 대회에 참가했던 것도 아니다. 언제나 문제는 내부에 있다.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번 WBC 대표팀을 구성하는 과정부터 문제였다. 선수 구성을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해외파 선수들의 불참과 주력 투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대표팀 엔트리를 7번이나 갈아엎어야 했다. 1루수가 3명, 유격수가 3명인 반면 2루수와 3루수 요원은 1명씩만 뽑는 등 선수 구성도 비효율적으로 이뤄졌다. 최상의 전력을 구축하는데 실패한 팀이 4강 이상, 우승을 논하는 건 애초부터 과욕이었는지 모른다. 비슷한 수준의 대표팀을 서너 팀씩 꾸릴 수 있는 미국, 일본과 달리 한국은 그만큼 풍부한 선수층을 갖추지 못했다. 주전 하나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를 훨씬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로 대신 채워야 한다.

상대팀에 대한 준비 부족과 자신에 대한 과신도 발목을 잡았다. 한국은 대회 전부터 일본과 쿠바, 미국 등 2라운드 이후에 초점을 맞췄다. 같은 조에서는 대만 정도를 까다롭게 여겼을 뿐, 1라운드 통과는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일부 야구인들이 "네덜란드가 복병"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실제 첫 경기 내용을 보면 얼마나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는지 의문이다. 한국은 네덜란드 좌완 선발 마크웰의 재빠른 팔 스윙과 절묘한 컨트롤에 꽁꽁 묶였다. 네덜란드 톱타자 시몬스에겐 3안타를 얻어맞았고, 중심 타선에는 4안타 3타점을 허용했다. 점수가 0대 3으로 벌어졌을 때는 필승조를 아끼면서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4, 5점째를 추가로 내줬다. 반면 네덜란드는 지난해까지 롯데에서 활약한 사도스키에게 한국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기민한 투수 교체로 한국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했다.

'한 수 아래'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네덜란드에 대패하면서 한국의 WBC 전략도 크게 꼬였다. 네덜란드와 호주를 잇달아 꺾고 여유롭게 대만전을 치른다는 애초의 구상은 폐기 처리됐다. 네덜란드와 대만전, 네덜란드와 호주전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대만이 네덜란드를 꺾고, 네덜란드가 호주에 승리하면서 한국은 대만에 6점차 이상 대승을 거둬야 2라운드 진출을 노려볼 수 있게 됐다.

최약체 호주를 상대로도 간신히 6대 0 승리를 거둔 대표팀이 대만에 6점차로 이기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과제였다. 대만은 한국이 최상의 전력으로 나서도 만만찮은 상대다. '반드시 6점차 이상 대승을 거둬야 한다'는 주문은, 선수들에게 필요 이상의 중압감으로 작용했다. 부담에 억눌린 타자들은 몸이 굳었고 스윙도 무뎠다. 찬스에서는 한 점 한 점 착실하게 내기보다는 큰 것만 노렸고, 이는 주루사와 여러 차례 평범한 플라이아웃으로 이어졌다. '한 점도 주면 안 된다'는 부담은 수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대만에 선취점을 내준 실책은 그런 부담의 결과였는지 모른다.

차라리 대량 득점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단순하게 '승리'를 목표로 경기에 임했다면 어땠을까. 상대에 5점을 먼저 내주고 시작한 경기는, 뉴욕 양키스가 아니라 지구방위대가 와도 역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0대 0으로 시작한 경기는 차근차근 한두 점씩 내다 보면 다득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똑같은 6점차라도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꽤 크다. 과도한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한 점씩 착실하게 내는 전략으로 대만을 상대했다면, 오히려 구멍 난 댐이 한순간에 무너지듯, 상대를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한국 대표팀에 중압감은 '힘'이 아닌, 무거운 '짐'으로 작용했다.

▲'WBC 참사'가 일어났다. 2013 WBC 1라운드 B조 대한민국과 대만의 경기가 열린 5일 대만 타이중 인터컨티넨탈구장에서 정근우가 5회말 이대호의 안타에 홈으로 쇄도했다가 태그아웃을 당한 모습. ⓒ로이터=뉴시스

한국 야구의 민낯을 직시하라

한국 야구는 그동안 '세계 최강'이라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 WBC 준우승 등 빛나는 성과에 취해 한국 야구가 마치 미국,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착각했다. 이번 대회 네덜란드전 패배와 1라운드 탈락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만 당한 게 아니다. 브라질에 야구를 가르쳐준 일본은 1라운드에서 브라질에 혼쭐이 났다. 쿠바도 브라질에 간신히 이겼다. 그런 브라질은 미국으로부터 야구를 배운 중국에 패배했다. 빠르게 평준화되는 세계 야구의 추세 속에, 과거의 영광에만 빠져 있다가는 언제든 '한 수 아래'로 생각한 나라에 덜미를 잡힐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 야구는 지난해 700만 관중 돌파에 성공했다. 여기에 9, 10구단을 창단하며 800만, 나아가 1000만 관중 시대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적 성장에 비해 얼마나 튼튼한 내실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당장 최근 몇 년 새 제기되고 있는 '하향 평준화' 논란이 대표적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전체적인 경기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열악한 야구 인프라, 후진적인 구단 운영 시스템은 여전하다. 야구 발전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구단 이기주의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가득인데, 거품 인기와 구름 관중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돌아보고 바로잡을 여유가 없었다. 이번 WBC는 그 화려한 외양에 가려진 한국 야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WBC 실패가 당장 이번 시즌 야구 인기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해 초 경기 조작 파문에도 700만 관중을 돌파했던 프로야구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번 참사는 한국 야구에 찾아올 위기의 예고편이다. 2009 WBC 준우승을 끝으로 한국 야구는 국제 무대에서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작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대회를 비롯해 아시아선수권, 야구월드컵에서 모두 4강 진입에 실패했다. "아마추어 레벨에서 국제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혹시 이번 WBC 결과는 아마추어 야구의 경쟁력 저하가 성인 야구로 이어질 신호탄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이번 대회 고참급으로 참가한 이승엽, 정대현, 서재응 등은 7년 전 WBC에서도 핵심 멤버였다. 당장 이 선수들이 빠지면 내년 아시안게임 대표팀 구성을 어떻게 할지 막막하다. 한국 야구의 세대교체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도 된다. 미국으로 떠난 류현진의 뒤를 잇는 슈퍼스타감은 보이지 않는다. 윤석민, 오승환, 최정 등이 잇달아 해외로 진출하면, 남은 팬들은 야구장에서 누굴 응원해야 할까.

한국 야구의 폭발적인 인기 상승은 올림픽, WBC 등 국제 대회에서 만들어낸 드라마가 원동력이었다. 팬들이 야구장을 찾아 응원하는 건,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스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야구에서는 당분간 국제 대회에서 거둘 성공도, 리그를 지배하는 슈퍼스타의 존재도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에 신생 구단 가세로 인한 경기력 저하가 더해지면 프로야구 인기의 하락은 기정사실이다.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외면해온 위기가 이제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다. 외면하려 해도 고개를 돌리기가 어렵다.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가 됐다. 이번 '타이중 참사'를 쓴 약으로 삼아서, 한국 야구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기본에서 다시 시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야구에서 나쁜 일은 종종 전화위복이 되어 돌아온다. 한국과 대만전 1회말, 대만 포수의 2루 악송구는 정근우의 3루 아웃으로 연결됐다. 2006년 아시안게임도 비슷한 예다. 당시 한국은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을 꾸렸다가 '도하 참사'를 겪었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들은 이후 한국 야구의 주역으로 성장했고, 올림픽과 WBC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이번 WBC의 실패도 그처럼 훗날 전화위복으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www.futuresb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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