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승리하면 현장에 들어갈 거요?"
당원 모임 뒤풀이 때였다. 동년배의 당원이 물었다. 술이 거나하게 몇 순배 돌아간 자리였다.
"해고자가 복직투쟁 승리하면 현장으로 돌아가는 건 당연하거 아니에요?"
이건 내 대답이 아니었다.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젊은 여성당원이 끼어들며 하는 말이었다. '그래, 당연히 돌아가야지….'
서른다섯에 입사해서 쉰이 되었으니 인생의 한 허리가 고스란히 이놈의 회사에 묶여 있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지천명의 나이…, 나한테 무엇이 남았나? 1997년 입사할 때, 갓 돌이던 딸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새로운 무엇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살림은 더 힘들어졌다. 삶의 가운데 토막이 고스란히 발려서 가시만 남은 느낌이다.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재능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오십이 넘은 남자 재능교사가 전국에 몇이나 될까? 다섯도 안 되지 않을까?' 괜히 감자탕 뼈다귀에 붙은 우거지를 뒤적거리며 혼자 생각에 빠졌다.
술자리에 진상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군대생활 때는 말이지…'와, '그때 축구할 때 말이지…'에, '내가 왕년에 말이지…'까지 덧붙여진다면 마초 진상 그랜드슬램이 따로 없겠다. 다행히 우리 당원들 술자리에서는 이런 일은 없지만, 모임의 보람차고 뿌듯한 여운을 즐기는 자리에서 혼자 생각에 빠져 분위기에 초치는 것도 진상이겠다. 그때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서 한 동지가 묻는다. 어색한 상황을 수습하려고 그랬을까?
"그… 재능 여성동지들 말이에요. 하나같이 예쁘고…, 거진 다들 미혼이시잖아요? 우리 000동지한테 다리 좀 놔주는 건 어때요?" 오호라! 000의 눈이 동그래진다.
"내가? 나는 비추일세. 이 사람아!"
왜 그랬을까? 당시 취중이기는 했지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 지난해 4월 시청광장 앞 환구단에서 단식농성 중이던 유득규 학습지노조 사무처장. ⓒ이혜정 |
아까워서 그랬을까? 사윗감이라고 데리고 온 녀석한테 왠지 모를 부아가 치밀어 '난 이 결혼 반댈세.' 하며 심술을 부리는 아빠의 심정이었을까? 초식동물 같은 맑고 순한 눈을 가진 이십대의 동지가 마흔이 되었다. 키가 크고 늘씬하여 사슴 같던 삼십대의 동지가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인정 많고 음식을 뚝딱 잘 만들어내어 큰살림을 할 거라던 동지는 사십 중반이 되었다. 심성의 결이 고와 눈물이 많았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13년, 개인의 이득보다는 옳은 것을 좇아 살아온 이들….
"마이너스는 없다" 한마디에 회비 대신 납부한 우리는 '좀비'
이게 회사인가?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서 조회하고, 교육받고, 무거운 교재 책가방을 들고 수업하러 나가면 밤 열 시를 넘겨서 끝나기가 예사였다. 내 아이가 아파도, 아파서 몸이 천근만근이어도 회원들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다. 아침 전단지 홍보, 주말 홍보, 휴일 출근, 한 달을 꼬박 이렇게 일해도 회원가입 실적이 좋지 않거나 그만두는 회원이 많은 달은 급여가 대폭 깎여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노동조합이 간절히 필요했던 이유는 회사의 부당한 영업 강요 때문이었다. '마이너스는 없다! 무조건 제로 이상을 맞춰라!' 지국에 그달의 실적 목표가 내려오면 '무조건' 거기에 맞춰야 했다. 그만둔 회원들의 회비를 대신 납부하며 회원을 유지해야 했다. 이를 우리는 강시라고 불렀다. 죽어도 죽지 않는…. 또 이미 그만둔 회원의 회비를 납부하여 임의로 되살려 내기도 했다. 이를 좀비라고 했다. 자꾸만 되살아나는….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1999년 겨울, '꼭 다시 돌아올 거야.'라며 이별을 고하고 한 집 한 집 문 닫고 돌아설 때마다 울음이 나왔다. 일주일을 주택가 길거리에 눈물을 뿌리고 다녔다. 파업도중 '선생님, 언제 오세요?'하고 묻는 회원의 전화를 받고 농성장 후미진 곳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다 같은 처지의 동료와 눈이 마주쳐 함께 울기도 했다. 특수고용노동자란 말이 있는지도 몰랐던 그때, 투쟁을 지도하던 민주노총 활동가들도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말하던 그때. 도곡동 사옥 점거파업농성 18일 만에, 설립신고서 접수 40일 만에 위탁계약직 최초로 노동조합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고 펑펑 울었다. 그해 12월 31일, 노동조합과 회사가 우선협약을 체결할 때까지 33일간 파업투쟁은 계속되었다.
한 이삼년, 매일이 축제와 같이 즐거웠다. 정말 말 그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조합원! 간부들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홍보활동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가방에서 뭉텅이의 조합 가입원서를 꺼내며 의기양양해했다. 교사들은 이제 더 이상 주눅 든 근로자가 아니라 당당한 노동자였다. 단체협약을 체결하며 불합리한 제도들을 고쳐나갔고 복지를 늘렸다. 학습지뿐만 아니라 특수고용직 최초의 단체협약체결이었다. 이제 사무실에서 관리자들은 전에는 일상이었던 부당한 업무지시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부당함에는 함께 맞서서 따질 줄 알게 되었다. 그 지국의 교사들뿐 아니라 다른 지국의 교사들이 함께 나서서 사과를 받아냈고, 잘못을 고쳤다. 그렇게 노동조합의 깃발아래서 참으로 격한 행복을 맛보았던 시기가 있었다.
회사는 우리가 당당하고 행복하게 일하는 것이 그렇게 언짢았나 보다. 근로자는 좀 수그리고, 주눅 들고, 눈치 보고, 군말 없이 일하는 것이 저들의 구미에 맞았나 보다. 조합원들이 모두 쫓겨난 지금의 현장에는 예전보다 더한 파렴치가 판치고 있고, 유령회원들이 주눅 든 교사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한때 조합원 수 3800명, 사무실서 혼자 책상 앉다 노조 탈퇴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한때 전국의 조합원 수가 3800명이 넘었던 때가 있었다. 현장관리자들의 주 업무가 조합원들을 탈퇴시키는 것이 되었다. 영업은 이제 뒷전이 되었고, 조합원 탈퇴 실적에 따라 고과가 매겨졌다. 회식자리에서 팀장들이 조합원을 집단 폭행하기도 했다. 주부교사의 아파트로 술 취한 국장과 지구장이 밤 12시가 넘어서 찾아가 백지를 들이밀며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자기들이 노조 탈퇴서를 써서 보내겠다고 했다. 조합원을 지국의 팀에 소속시키지 않고 책상을 혼자 떼어놓기도 했다. 수업을 빼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한 명 한 명씩 집요하게 탈퇴시키거나 퇴사시켰다. 2010년 12월 31일, 급기야 전국에 남아있는 조합원들을 전원 해고했다.
재능의 투쟁이 어찌 1800여일 만이겠는가? 10여 년을 싸워왔다. 3번의 단체협약 갱신체결 때마다 2년 이상을 싸워야 했다. 삭발, 단식, 고공농성, 가두선전…, 그리고 회사의 가압류, 민형사 고소고발…. 배달호 열사께서 가압류에 항거하여 분신하신 2003년도에 재능 회사는 이 신종 노조탄압 수법을 재빨리 받아들여 조합비와 간부급여 등 약 9억 원을 가압류했다. 당시 단식투쟁을 했던 고 정종태 전 위원장은 그 후 2년도 되지 않아서 위암이라는 병마를 얻어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12월 21일에 시작한 거리농성투쟁 1500일 즈음에, 우리는 또 한 명의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다. 병상에 누워서도, 그렇게 아팠으면서도 우리에게 부담이 될까봐 괜찮다고만 했던, 웃음이 너무나 맑았던 고 이지현 전 법규부장. 해고자의 멍에를 진 채 가족과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달 그달의 실적에 따라 수십만 원씩 급여가 들쑥날쑥해지고, 많게는 100만 원이 넘게 급여가 깎이는 이상한 수수료제도 도입, 이에 불응해 시작한 천막농성. 회사는 우리의 살과 같은, 피와도 같은 단체협약을 파기했다. 노조사무실을 폐쇄하고, 사무실 집기를 실어갔다. 청약저축통장을 압류하고, 승용차를 경매 처분했다. 23억 원이 넘는 손배소를 청구하고, 채무불이행자로 등재하여 신용불량자를 만들었다. 시어머니께서 혼자 계실 때, 집달리들이 들이닥쳐 장롱에, 컴퓨터에, 세탁기에, TV에, 자식들 김치 담가 주신다고 손수 장만하신 김치냉장고에 압류딱지를 붙였다. 농성장에서 급히 달려와 시어머니를 대하는 며느리의 마음이 어땠을까? 농성물품을 빼앗아가는 경찰에 항의하다 구속되어 35일을 감옥에서 보낸 미혼의 여성조합원의 마음이 어땠을까?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차마 옮기지 못할 소리를 들을 때 그녀들은 얼마나 치 떨렸을까? 얼마나 무섭고 수치스러웠을까? 이들이 뚫어놓은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고속도로에서 차가 주저앉았을 때 얼마나 두렵고 절망했을까?
싸운 지 십 년, 그래도 현장에 들어가야겠다
초식동물의 순한 눈매를 가졌고, 사슴 같았던 그녀들…, 만난 지 십년이 훌쩍 넘었다. 커다란 주목을 받지도 못한 채, 짐승만도 못한 용역깡패들의 겁박에 치를 떨며 한뎃잠을 자야했고, 때론 한밤중 취객의 소란에 노루잠을 자며 지금도 5년째 거리에서 보내고 있다. 눈물이 많은 것은 여전하나 이제 이들은 순하고 여릿여릿하지만은 않다. 투사가 되고 전사가 되어있다. 경찰과 맞설 때, 노무팀 직원들과 싸울 때, 어이쿠 무셔라…,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단단하게 예뻐진 동지들….
이 나라에 무산자로 태어나 산다는 것이 전생에 아주 못된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터에서 쫓겨나고 삶에서 밀려나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삭발을 하거나, 굶거나, 거리에서 구르거나, 매달리거나, 하늘로 오르는 것 밖에 마땅히 없는 현실, 그래도 대답 없는 세상이 기가 막히다. 때로는 개똥밭보다 못한 이승에서 굴러봐야 더 나을 게 뭐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승리하면 현장에 들어갈 거냐고? 그래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때 내가 몇 살이 될지 모른다. 그래도 들어가야지. 얼마나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꼭 들어가야겠다. 단체협약, 꼭 회복해야지. 이제 용역깡패들을 철수했다고 해서, 이제 압류를 일부 풀었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1800일간의 죄과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저들에게 악행의 승리를 학습하게 해서는 안 된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누이들과 함께 현장으로 돌아가야겠다. 좀 더 지난 날, 내가 먹을 채마밭 일굴 연장들이나 챙겨서, 높바람 막아줄 낡은 시집이나 몇 권 싸들고 두메로 들어가기 전까지…, 현장에 좀 있어야겠다.
* 이 글의 원제는 <사랑하는 나의 여인들>입니다.
2012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수상작 ① "시민들에게 욕먹는 우리는 다산콜센터 상담원입니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