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향소를 지키는 쌍용차 해고자들이 송전탑에 있는 사람 모형 세 개 중 하나를 가리키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저게 상균이 형(한상균 쌍용자동차 전 지부장)인가?" "아니지 이거지." 그러는 사이 지나가는 시민들은 간혹 미안한 듯, 신기한 듯 송전탑 모형 사진을 휴대전화로 찍어갔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송전탑은 묘한 대비를 이뤘다.
쌍용차 해고자 박정만(47) 씨는 흐뭇한 듯 알록달록해진 송전탑 모형을 지켜봤다. 응원문구가 적힌 색종이가 송전탑을 꾸몄다. '정리 해고될 인생은 없다', '노동 없는 경제 민주화는 가짜', '하늘로 오르지 않아도 땅에서 살 수 있게'…. 송전탑이 색종이로 가득차면 나중에는 '진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전구도 달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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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청 12일 분향소 철거 예고
박 씨의 아침은 분향소 앞 인도를 빗자루로 쓸면서 시작된다. 분향소 주변이 깨끗해야 시민들의 서명도, 색종이 응원문구도 잘 들어온단다. 영하 10도의 한파에 노란 작업복을 입은 서울시 환경미화원이 인사를 건넨다."안 얼어 죽고 살았네요? 추워서 어떡해?" 박 씨도 인사한다. "내일 새벽에 놀러 와요. 계고장 날아왔어. 겨우 내 집이 생겼는데 이제 맨땅에서 자라고."
박 씨는 지난 9개월간 분향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진짜 집'에 못 간 지는 6개월째다. 화장실 문제는 인근 서울시청에서 해결하고, 씻을 때는 금속노조 사무실로 간다. "송전탑에 있는 사람들이 더 고생"이라고 말하는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손바닥만 한 난로는 '비닐 집'의 추위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중구청은 12일 분향소 철거를 예고했다.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불법 농성촌'이라는 비판 기사가 올라온 직후였다. 박 씨는 "대한문에 집회신고를 마쳤다"면서도 "행정집행을 하려면 계고장을 세 번 보내야 하는데, 중구청이 계고장을 한 번만 보내고 집행 통보를 했다"고 억울해했다. 다른 해고자는 "철거하면 비닐 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해고자가 읊조렸다. "즈그는 (정리해고)법도 안 지키면서 우리한텐 맨날 법 지키라고 하고. 법을 안 지키니 약속(8.6 노사합의)은 더 안 지키지."
<조선일보>는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덕수궁 대한문은 시민과 외국인의 관광명소"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대한문 분향소 옆에는 외국인 등 관광객에게 전통의상을 대여하는 부스가 교대식이 열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거리를 합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 그 부스만큼의 깊이를 차지하고 있는 바로 옆 분향소는 합법과 불법을 가르는 경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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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해고자 "우린 <의자놀이> 안 봐요"
점심때가 되자 우체국 노동자가 '부재자투표 투표용지' 우편물을 배달하러 분향소에 들렀다. 주소로 "대한문 옆 농성촌"이라고 적혀 있었다. 생경한 주소였다. 분향소가 설치된 지 6개월, 이제는 우체국 노동자도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철거 통보가 오자 기자들도 분향소에 분주히 오갔다. 스위스에서 왔다는 한 외국인 기자는 "정말 23명이 자살 등으로 죽은 게 맞느냐"고 물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스위스는 한국보다는 복지가 잘 돼 있다"며 "스위스에서도 노인들이 해고로 아주 간혹 자살하는 사건이 터지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잇따라 자살하거나 사태가 이렇게 장기화되지는 않는다"고 놀라워했다.
분향소를 철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해고자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박 씨는 영정사진을 가리키며 "나도 저기 들어갈 뻔 했다"고 덤덤히 말했다. 또 다른 해고자 윤충렬(44) 씨는 다 잘 되고 분향소를 철거하면서 얼굴 없는 영정사진 대신 진짜 '영정사진'으로 위령제를 지내고 싶다고 했다.
윤 씨는 수십 번도 더 말했을 스물두 번째 죽음을 설명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취직한다고 말하고 연락이 끊긴 동료가 죽은 지 3일 뒤 주검으로 발견됐다. 취직해서 연락이 없겠거니 짐작했던 윤 씨에게는 특히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지금까지 돌아가신 분들은 주로 연락이 끊기고 혼자 살던 분들이었어요. 여기 남은 사람들은 살아서 싸울 생각을 하지 죽지는 않거든요. 심리치료까지 받고 같이 싸우던 동료가 자살했을 때 충격은 다르죠."
그는 지금도 소식 끊긴 동료들이 어떻게 사는지 걱정이다. 소식이라도 들으면 덜 불안할 것 같은데, 연락이 끊긴 동료들은 가족, 친지, 이웃, 동료와의 관계가 조금씩 단절되는 것 같다.
윤 씨는 공지영 작가의 <의자놀이>를 읽을 수 없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자꾸만 상처를 찌른다. "두 번째 돌아가신 분 이야기가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책장을 넘기기가 싫어요. 그래서 우린 <의자놀이> 안 봐요."
"한참을 엎드려 울다간 젊은이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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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가 초라하고 전기도 안 들어오고 난방도 안 되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게 싸워서 가슴 아프다고 미안하다고. 자꾸 미안하다는데 우리 마음은 그게 아닌데…. 그분께 잘 생활했으면 좋겠다, 모두가 함께 행복한 게 좋다고 했어요."
매일 분향소를 지키던 김 씨는 이날 어스름이 내려오고서야 분향소에 왔다. 어머니가 암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을 때 돌아가셨다. 당시 그에게는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몰래 임종만 지켜보고 구속됐다. 수술을 마친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는 어머니께 미안했다.
남동생은 쌍용차에 다닌다. 형은 해고되고 동생만 남았다. 김 씨가 평택공장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집회를 하면 출퇴근하는 동생이 건강을 묻는다. 동생이 짠한 김 씨는 출근하는 옛 동료들은 아직 어색하다고 했다. '구사대'로 동원됐던 아는 얼굴들이 출근길을 지나간다. 파업 때의 끔찍한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그의 상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친척 모임, 가족 모임도 점점 못 간다는 그는 싸움을 그만할 수는 없다고 했다. 찾아오는 시민들을 보면 "복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의 새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분향소에 어둠이 내렸다. 맞은편 시청광장 크리스마스트리에 전구가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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