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니겠는가. 야구 경기장의 정중앙에는 마운드가 있고, 그 위에서 투수가 공을 던져야만 야구 경기가 시작된다. 승리와 패배의 기록을 가져가는 것도 타자가 아닌 투수다. 야구 역사를 돌아보면, 결국 우승은 강한 투수력을 갖춘 팀의 몫이었다. 26명의 1군 선수명단 중에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포지션 역시 투수다.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1라운드가 끝나기 전에 뽑힌 11명 중 무려 8명이 투수였다. 그래서 전설의 명감독 케이시 스텐겔은 "투수가 너무 많다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했고, "뛰어난 투수들은 항상 뛰어난 타자들을 막아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지금은 불펜분업화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경기당 많은 투수를 필요로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투수들의 시대. 오늘날의 야구를 간명하게 설명하는 가장 쉬운 표현이 아닐까.
하지만 연말 시상식 때가 되면 상황은 역전된다. 연말은 야구가 투수놀음에서 '타자들만을 위한 잔치'로 돌변하는 시기다. 올해의 주요 수상자 명단을 보자. 시즌 MVP는 1루수 박병호가, 신인왕은 2루수 서건창이 가져갔다. 둘 다 타자다. 개최 여부가 극히 불투명한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도 투수가 받을 수 있는 상은 딱 하나뿐이다. 결국 올 시즌, 시상대에서 턱시도를 입고 수상소감을 말할 기회를 얻는 투수는 딱 1명으로 그칠 전망이다. '투수놀음'이라는 야구에서 말이다.
물론 MVP와 신인왕이 타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투수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2009년 신인왕 수상자는 두산 마무리투수 이용찬이었다. 2011년에는 윤석민이 시즌 최우수선수에 올랐고, 2008년에도 투수인 김광현이 MVP를 수상했다. 2006년에는 현진-류가 신인왕과 MVP를 한 몸에 거머쥐었으며, 선동열 KIA 감독은 해태 시절 투수로서 세 차례나 시즌 MVP가 되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문제는 투수가 이런 상을 수상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원년인 1982년 이후 투수가 시즌 MVP를 따낸 것은 모두 12번. 나머지 19번은 타자에게 돌아갔다. 또한 투수 신인왕은 15명으로, 전체 30명 중 절반에 그쳤다. 투수가 MVP와 신인왕을 석권한 것은 7번에 불과한데 비해, 타자가 둘 다 휩쓴 사례는 무려 10차례나 된다. 투수가 어지간히 압도적인 성적을 내지 않는 한, 매일같이 경기에 나와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타자를 제치기는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투수 분업화로 인해 리그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성적의 투수가 나오기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1982년 당시만 해도 경기당 투입된 투수의 수는 2.12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수는 1997년 3.28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2000년대 이후로는 매 경기 4명 이상의 투수가 마운드를 밟는 추세다. 여러 명이 나눠 던지면, 그만큼 개인성적을 올릴 기회도 줄어든다. 완봉이나 완투 같은 대기록이 나올 확률도 희박해진다. 자연히 투수 쪽의 존재감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프로야구에서 오직 투수만을 위해 주어지는 공식적인 상은 골든글러브 하나뿐. MVP나 신인왕 수상을 놓치면, 리그 투수 전체가 골든글러브만 바라봐야 한다. 반면 타자들은 MVP를 놓쳐도 각 포지션별 골든글러브 9개가 기다리고 있다. 올 시즌 1군 경기에 단 한번이라도 나선 투수의 수는 188명, 타자가 220명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투수는 골든글러브 한 자리를 놓고 188대 1의 경쟁을 하지만, 야수들의 경쟁률은 24대 1이다. 한 경기 네 번 대타로 나오는 지명타자도 골든글러브를 받는데, 연간 70이닝을 등판해서 팔이 빠져라 투구하는 불펜 투수들은 찬밥이다. 어쩐지, 불합리하다.
▲MVP는 주로 타자의 몫. 한국 프로야구도 사이영 상처럼 투수를 위한 상을 만드는 방안을 고민할 때다. 지난 11월 5일 오후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2012 팔도 프로야구 패넌트레이스 시상식에서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넥센 박병호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
이참에 프로야구에도 투수들만을 위한 상을 따로 제정하는 것이 어떨까.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선례는 참고가 된다. MLB에서 최고투수를 뽑는 사이영상이 생긴 것은 1956년. 그 전까지는 투수와 타자 구분 없이 투표로 뽑는 MVP와 ROY(신인상)만이 존재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타자들의 차지여서, 1955년까지 나온 71명의 MVP 중 투수는 15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56년 사이영상이 신설된데 이어, 1976년에는 투수분업화 추세를 반영하듯 '롤레이즈 구원상'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구원투수들도 시상대에서 부모님과 코치님 이름을 나열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또한 포지션별 최고수비수를 뽑는 골드글러브와 포지션별 공격력을 평가하는 실버슬러거가 도입되면서 투수들의 입상 기회는 더욱 늘어났다. 사실 올해 프로야구에서 '장원삼이 MVP를 받아야 한다' 또는 '박희수도 MVP 후보에 올라야 한다'는 다소 무리한 주장이 나온 데는, 투수가 받을 수 있는 상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투수만을 위한 상이 신설될 경우, 서로 전혀 다른 영역인 투수와 타자의 성적을 직접 비교하는 난처한 상황도 사라질 것이다.
투수상을 따로 만들면 투수가 MVP까지 독식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아닐까? 우려와는 달리, 사이영상 신설 이후 투수가 MVP까지 석권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56년 이후 MVP 수상자 110명 중 투수는 9명으로 이전보다도 더욱 줄어들었다. 2011년 저스틴 벌랜더가 1992년 데니스 에커슬리 이후 오랜만의 투수 MVP에 오르긴 했지만, 올해는 미겔 카브레라가 MVP를 차지하며 원위치로 돌아갔다. 사실 지난해 벌랜더는 워낙 충격적이고 압도적인 성적을 냈기 때문에, MVP까지 차지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투표인단은 의식적으로 '투수는 사이영, 타자는 MVP'의 황금분할을 염두에 두게 마련이며, 이는 타자들이 당할 역차별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리고 설령 투수가 MVP까지 한꺼번에 차지하더라도, 그래도 투수가 받는 상보다는 타자가 받는 상의 수가 훨씬 많다.
내년이면 프로야구도 32년째를 맞이한다. 그간 흥행과 경기 수준 등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대세를 거스르는 움직임만 없다면 10구단과 800만 관중도 더 이상 꿈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질적 양적 발전에 비해 유독 시상식만은 1982년 원년에서 지금까지 제자리걸음이다. 수비율을 기준으로 뽑던 골든글러브가 83년 투표 방식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시상 내역에 거의 변화가 없다. 부상으로 주는 트로피의 표면처럼 딱딱하게 굳어져서, 형태를 바꿀 줄은 모른다. 아카데미가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에 맞춰 시각효과상을 신설하고, 그래미도 전자음악과 힙합 등으로 시상 분야를 넓혀가는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시대가 바뀌면, 상도 달라져야 한다. '투수놀음'으로서의 야구에 걸맞은, 투수분업화라는 큰 변화에 보조를 맞춘, 투수들을 위한 새로운 상의 도입이 필요한 때다. 내년 이맘때는 연말 시상식에서도 투수들의 이름을 좀 더 자주 들을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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