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유엔은 2009년 말 '2012년을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세계협동조합의 해 공식 책자를 통해 "협동조합이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일깨워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2012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대세를 형성한 복지국가 담론에는 자칫 국가주의의 확대로 귀결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따라붙는다. 복지국가 담론의 한계를 넘어, 또한 한국 노동운동의 편협한 이념과 노선을 넘어 협동조합 운동의 대중적 발아를 위한 제언을 10회 기획으로 담아본다. <편집자>
한국 노동운동이 잃어버린 자유인들의 결사체 공동체운동
1970년 전태일의 산화 이래 전개된 70년대 민주 노조운동은 명확히 새로운 공동체운동이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마당이자 새로운 공동체였다.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소모임, 노동조합의 각종 소모임은 그 자체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소공동체 운동체였다.
소모임은 그 어떤 거창한 이념 학습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냥 일상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자신이 하나의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인정을 하고 인정을 받는 기초공동체였다. 그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발돋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책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에는 청계피복, 동일방직 등과 함께 19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노조' 조합원 7명의 기록이 담겨있다. ⓒ삶이 보이는 창 |
1987년 이후 새롭게 전개된 한국의 노동운동 또한 초기에는 노동조합의 각종 소모임을 비롯한 노동조합 자체가 강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1987년 이후 울산의 현대 노동자들이 경험한 것도 이 같은 노동공동체였다.(김 준, 「잃어버린 공동체: 울산 동구 지역 노동자 주거지역 공동체의 형성과 해체」, 2006) 그러나 199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급속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조합은 임금과 단체협약을 사용주와 대신 협상해주는 청부 기관일 뿐이다.
노동자들의 생활세계를 국가와 자본의 지배 종속 아래 버려둔 한국 노동조합운동
이른바 신자유주의란 국가까지도 무장 해제시키면서 일상생활에서부터 공공 부문까지도 자본의 지배종속 아래 상품화하고 자본주의 시장에 개방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소수 거대 금융독점자본 이윤을 극대화하겠다는 정책이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철저히 신자유주의를 도와주고 말았다. 그리고 일부이지만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기생충운동으로 변질하고 만 측면까지 있다. 세상에 삼성재벌과 북한에만 세습이 있는 줄 알았더니 조합원 자식에게 노동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한 세습 단체협약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작업장 안의 민주화와 노동조건 개선 투쟁에만 갇혀 정작 중요한 작업장 밖 노동자들의 일상생활 영역을 아예 독점자본의 독무대로 방치해버렸다. 그리고 노동자들 자신이 재벌 브랜드 소비상품을 앞장서서 구매하는, 재벌기업 배를 불려주는 만만한 후원자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노동자 집에 들어가 보아도 가전제품에서부터 그 많고 많은 일상생활의 상품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노동자 1인 가족이 재벌 기업의 순이익에 이바지한 액수는 어마어마하다.
일상생활을 자본의 지배 종속에서 탈환하는 운동: 협동조합운동
자본이 작업장 밖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철저히 지배 종속시키고 있는데 대항하여 노동조합운동은 당연히 이를 탈환해 와야 한다. 그리고 이런 탈환 운동이 다름 아닌 협동조합 운동이다. 협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노동자 일상생활의 협동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협동조합운동의 효시인 1844년의 '로치데일 공평개척자조합'도 영국의 해고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었다.
국가권력과 자본이 공공의 영역을 독점자본의 지배종속 아래 팔아먹으려 한다면 당연히 노동운동은 이를 탈환해 와야 한다. 대통령 선거를 통해 행정권력 일부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입법권력 일부를 노동자 친화의 권력으로 탈환해 온다고 해서 국가권력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민주정부 10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화해라는, 기념비를 세워도 모자랄 업적을 이룩했지만 1997년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여 해고자를 양산하고 비정규직 세상을 만든 반노동 정권이었다. 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한국의 진보란 국가주의를 신봉하는, 그리고 기껏해야 서구 복지국가 모델을 염불처럼 돼내기만 하면서 대안의 사회경제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불임의 진보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노동정치는 협동의 힘으로 지역사회와 경제를 순환시키는 대안의 협동사회경제 조직들을 바탕으로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밑에서부터 바꾸어나가는,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정치운동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풀뿌리 정치사회운동의 기반이 다름 아닌 협동조합을 비롯한 협동의 사회경제 운동이다. 한국의 진보와 개혁세력은 그런 풀뿌리 정치사회운동, 경제사회운동의 가치와 목표가 없었다.
오히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협동조합운동을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내부의 개량주의 운동, 또는 한가한 중산층의 운동 정도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고도 편협하기 짝이 없는 단견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는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운동'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하고 새로운 생태순환의 공동체운동, 생명운동을 지향하면서 기존의 노동운동을 일정하게 비판한 데서 오는 역작용 또한 없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국가주의자가 아니었다. 철저한 공동체주의자였다. 그는 국가를 폐지하고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의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만든 번역어 코뮤니즘(communism)은 사실 공동체주의로 번역했어야 마땅했다. 그는 자본론에서 일관되게 자유인들의 연합체로서 협동조합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이와 달리 엥겔스는 협동조합에 대해 오락가락하는 글들을 남기고 있다.
반면에 레닌과 스탈린은 철저한 국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솔직히 공동체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상 협동조합운동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 때는 '사회주의의 학교'로서 협동조합운동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단 국가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또 철저하게 협동조합운동을 개량주의 운동으로 부정하고 아예 국가 권력에 종속된 어용 조합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 국제협동조합연맹(ICA) 로고 |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은 이런 국가주의적인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이론에 영향을 많게 받은 측면이 강하다. 아직도 민주노총의 일부 간부들이 협동조합운동을 중산층의 한가한 운동쯤으로 깎아내리는 조류는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노동조합은 조합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절 등의 특정 시기에 조합원들의 공동구매 사업을 벌이고 있다. 보험에서부터 등산복이나 명절 선물 등 조합원들이 공동구매를 할 수 있는 물품은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런 공동구매는 반드시 탈이 난다는 것은 그간의 수많은 공동구매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조합이 중간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기 때문에 수수료율과 기타 관리상 반드시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직거래 공동구매를 1년 열두 달 단결과 연대의 힘으로 관철하는 것이 다름 아닌 소비자 협동조합운동이다. 단순한 직거래 쇼핑몰이 아니라 조합원들 간의 인간관계를 밑에서부터 바꾸어 나가는 민주주의 학교로서의 협동조합운동이야말로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재정 문제뿐만 아니라 조합원 민주주의조차 실종된 상태에서 고사해 가고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거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자운동으로서의 협동조합운동뿐만이 아니다. 협동의 힘을 발휘하면 노동자들의 일상 생활세계를 얼마든지 자본이 주인인 세상에서 사람이 주인인 세상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다. 노동자들을 영원한 채무 노예로 만드는 금융독점자본과 은행들은 신용협동조합운동과 공제조합운동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지속 불가능한 주식회사 기업들은 생산협동조합운동이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다.
요컨대 협동사회경제는 노동자들이 바로 힘을 모으기만 하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현실의 대안 경제 체제이다.
조선 최초의 노동단체는 공제회, 즉 협동조합이었다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은 1920년대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이미 한국에서는 협동조합이 뜻하고 있는바 상부상조의 두레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갖고 면면히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자본주의의 근대적 공장이 설립된 시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대체로 19세기 후반 1894년으로 본다. 정미업 등에서 일본인들이 만든 공장이 생겨나고, 이때부터 동력을 사용한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1911년 작성된 제4차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04년 조선에는 공장이 정미업, 청주와 장유업(醬油業), 요업, 철공업 기타 등 총 16개가 있었고, 5년 뒤인 1909년에는 85개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11년에는 252개로 늘어났고, 1919년에는 1900개로 늘어났다. 이런 공장 증가와 더불어 근대 자본주의의 노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노동단체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4월 11일 서울 광무대(光武臺)에서 600여 명의 노동자와 사회운동가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전국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대회'를 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 해산될 때까지 전국에 걸쳐 대구, 평양, 안악, 개성, 인천, 예산, 정읍, 황주, 북청, 군산, 신천, 안주, 광주, 영흥, 신창, 안동, 경주, 해주, 청진, 진주, 강계, 삼진 등 20여 개 이상의 지회를 두었고, 지회들은 인근 소도시나 면사무소 소재지에 분회를 두기도 하였다.
▲ 조선노동공제회 <공제(共濟)> 창간호(1920년 8월) |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의 노동자 잡지와 노동신문인 월간 <공제>, <노동공제회보>를 발간하였다. <공제> 창간호에 실린 취지문을 보면 노동공제회의 목표가 노동자들 스스로 자각과 자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 건설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름을 팔고 권세를 농하여, 남의 노력으로 먹고 입으며, 고루거각(高樓巨閣)에 금의옥시(錦衣玉食)으로 일생의 안락을 천행(擅行)하는 역사적 유물은 현대의 패덕(悖德)이라. 이를 성토하고 확청(廓淸)함은 상제(上帝)의 정의이며 성근(誠勤)히 작업하여 자력으로 먹고 입음은 인세(人世)의 정직(正直)이라.... 자려를 교육치 못하고, 직업을 보장치 못하고, 질병과 고난을 구제치 못하고, 다만 사환(使喚)과 천대로 남을 위하여 양잠하고 남을 위하여 석공(石工)하였으니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삼사(三思)하면 남을 원망함보다 자기를 자책함을 마지아니할 뿐이로다. 그러나 변하였도다. 자조(自助)와 자존(自尊)을, 자각(自覺)과 자고(自高)를 알았도다. 자아의 노력을 남에게 빼앗기지 아니하고 자아가 의식(衣食)하여, 자아의 행복을 타인에게 의뢰치 아니하고 자아에서 구하여... 정의가 열렸도다.... 일어나서 나아가라.
- 공제 창간호, 1920, 167~170쪽(한국노총, 한국노동조합운동사, 127쪽에서 재인용)
조선노동공제회는 1921년 7월 15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70번지에 한국 최초의 소비조합을 설립하였다. 쌀과 채소, 땔감을 비롯한 각종 일용품을 도매가격으로 사서 노동자들에게 시가보다 싸게 공급하는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이후 1920년대 내내 조선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친목회, 노동조합, 노동수양회, 노동청년회, 노동우애회, 공제회, 노동계, 노동회, 노동상조회, 노동동맹회, 노동동무회, 노동동우회, 노동구락부 등 다양한 명칭을 내걸고 상부상조의 노동자 결사체, 노동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농민공동체를 지향하는 농민조합운동과 함께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투쟁의 기저는 사실상 이런 새로운 공동체운동이었다.
한국 노동조합운동, 협동조합운동에서 다시 시작해야
투쟁과 파괴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사회는 노동자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금 한국노동조합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대항한 투쟁에서도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다. 아니 패배를 지나 이미 자본과 국가에 노동조건과 복지를 구차하게 애걸하는 노동노예들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노동조합운동을 포함하여 한국 노동운동은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금과 같은 종업원 노조의 정체성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으며 무늬만 산별노조의 울타리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다. 종업원노조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새롭게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은 지역에 뿌리박은 지역 노동자들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지역노동조합으로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운동은 생활세계를 자본의 지배 종속으로부터 탈환하는 협동조합운동에 앞장서야만 그나마 활로를 열어갈 수 있다. 노동자들의 생활세계를 협동경제와 상부상조의 사회경제로 탈환해오지 않고서는, 노동자 생활세계를 민주화하지 못하고서는, 정치 민주화는 머나먼 일이다. 노동정치는 작업장 안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생활세계의 민주화로부터 시작되며,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운동의 주요 주체로서 노동조합운동이 다시 나서야 한다. 원산노련이 오늘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노동공동체 운동, 협동조합운동이다.
2012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이다. 한국노동운동은 이제 다시 전태일의 가슴과 영혼으로 부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 스스로 협동과 연대의 힘을 끌어 모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협동조합운동이 전국 방방 골골에서 다시 힘차게 불타올라야 한다.
* 이 글은 녹색평론 7·8월호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박승옥 공동대표 197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됐다.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을 펴냈다. 박승옥은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정책실장, 1987년 전태일기념사업회 부설 구로노동상담소 개설, 1990년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등으로 일했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뒤인 92년 농촌으로 내려가 10여 년 동안 생태, 환경, 에너지 문제에 천착했다. 2005년 6월부터 재생가능에너지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대표로, 2011년부터는 에너지생태건축협동조합 공동대표로 농업 및 에너지의 자립·자치와 우리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힘쓰고 있다. 최근 석유와 에너지에 대한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책 <상식: 대한민국 망한다>(2010년)를 썼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공제조합 운동을 하기 위해 2009년 9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와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으로 결성하고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라는 이름으로 2010년 2월 공식 출범했다. 현재 장례문화 공동체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상포계는 작년 12월 8일 영면한 고 리영희 선생님의 장례를 주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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