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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출신 악사 우륵은 신라의 총알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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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출신 악사 우륵은 신라의 총알받이"

양기석 교수 "진흥왕 행차 하림궁은 충주"

서기 550년 무렵, 지금의 경북 고령 일대를 점거하던 대가야가 멸망할 즈음에 많은 가야인이 정복자인 신라에 의해 지금의 충북 충주 일대로 강제 이주됐다.
  
  가야금 12곡조 작곡자로 유명한 가야 출신 악사(뮤지션)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니문(尼文)이 강제이주민 1세대라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군(唐軍)까지 축출하던 전쟁기인 660~680년 무렵에 신라의 외교문서 작성가로 맹활약한 강수(强首)는 그 후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는 정확히 언제, 어떤 의도로 가야인들을 충주 지방으로 이주시켰을까?
  
  한국고대사가인 양기석(梁起錫 .58)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최근 발간된 충북대사학회 기관지 '충북사학' 16집에 기고한 '국원소경(國原小京)과 우륵'이란 논문에서 소위 '총알받이'론을 주장했다.
  
  국원소경이란 신라가 주요 지방 거점 도시 5곳에 설치한 제2수도들인 5소경(五小京) 중 하나로, 지금의 충주다. 고구려가 국원성(國原城)을 설치한 이곳을 탈취한 신라는 서기 557년(진흥왕 재위 18년)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는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고 고치게 된다.
  
  양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가야인의 충주 이주정책에는 "신라가 북진 때에 가야계 유민들을 동원하여 선봉에 서게 하는 일종의 방패막이 역할을 맡기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즉, 왕태후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親政) 체제로 들어간 신라 진흥왕은 북진을 통한 한강 유역 확보를 천명하면서, 이를 위한 최전방 접경지역 요충지 충주에 가야인들을 배치시켜 그들로 하여금 북진의 선봉 역할을 수행토록 함으로써 신라인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연(燕)나라 도망자인 위만(衛滿)에게 서쪽 변경 100리 땅을 떼어주어 연나라 침략에 대한 방패막로 활용하고자 한 일이라든지, 마한왕이 남하해 온 온조 집단을 처음에 동북쪽 100리 땅을 떼어주어 말갈족 침입을 대비케 한 일과 비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라가 가야 유민들을 '총알받이'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일로 양 교수는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김구해(金仇亥)의 막내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을 든다.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은 신라의 북진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양 교수는 그의 부대에는 많은 가야인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신라가 충주 일대를 장악한 것은 언제일까? 흔히 진흥왕이 백제와의 협공작전에 의해 거칠부 등의 8장군을 보내 죽령(竹嶺) 바깥 고현(高峴) 남쪽 10개 군(郡)을 쟁취한 서기 551년이라고 말하지만, 양 교수는 이미 그 이전에 신라가 충주 일대를 장악했을 것으로 보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재위 12년째인 551년에 접어들어 정월에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꾼 다음, 그 해 3월에는 낭성(娘城)이란 곳으로 행차해 우륵과 그의 제자 니문을 하림궁(河臨宮)이라는 행궁으로 불러 가야금을 연주케 했다.
  
  양 교수는 이 기록에 나오는 낭성과 하림궁을 지금의 청주지역인 청원군 낭성면의 낭성산성으로 보는 학계의 통설을 거부하면서, 두 지명은 모두 지금의 충주 지역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낭성과 하림궁이 청주라면,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대 또한 청주에 있어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충주 일대를 장악한 것은 진흥왕이 이곳에 순행한 551년 이전일 수밖에 없으며, 더욱 정확히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도살성과 금현성이란 곳을 쟁취한 서기 550년에는 이미 충주를 수중에 넣고 있었다고 양 교수는 주장했다.
  
  그 뒤 진흥왕은 국원소경에 신라의 왕경인들을 이주시킴으로써 이곳을 부도(副都)에 걸맞는 위상을 지닌 도시로 육성했다. 나아가 진흥왕은 우륵의 음악을 기초로 신라의 대악(大樂)을 이곳을 무대로 완성케 함으로써 국원소경은 신라의 악도(樂都)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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