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초저성장 시대, 준비돼 있습니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초저성장 시대, 준비돼 있습니까?"

[이정전 칼럼] "'공정한 시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경제가 이미 수년째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각종 경제단체들과 정부가 금년의 경제성장 전망치를 수차례 하향조정해 왔다. 지난 11일 한국은행은 올해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4%로 낮추어 제시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연 3.0%이던 기준금리를 2.75%로 낮추었다. 경기침체의 장기화를 우려해서 조금이나마 돌파구를 마련해보자는 뜻인 것 같다. 결국 올해는 미국 발 전 세계 금융위기의 후폭풍으로 경제성장률이 0.3%에 그쳤던 2009년 이후 가장 나쁜 경제지표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언제 쯤 우리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은은 내년 하반기쯤으로 점쳤다. 그러나 이런 희망어린 전망은 유럽의 국가부채 위기가 해결되고 미국이 다시 경기침체에 빠지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 전제에 대해서도 회의가 많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경기침체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한다. 왜 그럴까? 과거 1930년대 세계대공황 때에는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 수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세기의 석학, 케인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진국 정부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어서 시장에 적극 개입할 여력도 없고, 케인스와 같은 스승도 없다. 그저 선진국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돈이나 마구 찍어댈 뿐이다.

설령 어찌어찌 해서 세계의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그 후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세계의 경기가 회복되는 순간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다시 폭증하면서 원유 및 원자재 가격폭등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원자재가격 폭등 사태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미래에는 자연자원 고갈 문제, 특히 에너지 수급의 문제가 과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양상으로 불거진다는 데에 입을 모으고 있다. 환경재해도 더욱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특히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큰 재앙을 더 빈번하게 안길 것이라는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경제성장을 크게 제약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불황의 늪을 벗어나더라도 초저성장(超低成長)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가들이나 관료들은 성장률을 올리는 데에만 급급하다. 대선 주자들도 경제성장에 대한 얘기만 하고 있다. 물론, 경제성장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초저성장의 시대가 대세라고 한다면, 이에 대하여 현명하게 대처할 채비도 갖추어야 한다. 초저성장 시대는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미답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저성장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될 것인가? 가장 먼저 우려되는 점은, 사회적 갈등이 한층 격화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과거 고도성장시대에는 열심히 일만 하면 모든 국민이 더 잘 살게 된다는 희망을 누구나 가질 수 있었다. 빈곤층에게도 일자리가 주어졌다. 비록 시장경제에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경제성장이 지속되는 한 빈곤층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졌다. 그래서 경제성장은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효과적인 정치적 구실이 되었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허나, 초저성장 시대에는 얘기가 사뭇 달라진다. 초저성장은 국민이 나누어먹을 파이의 크기가 거의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더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이 차지할 몫이 줄어드는 영합게임(zero-sum game)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럴 경우,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잘 사는 유일한 방법은 부자로부터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더 잘 살게 된다는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영합게임의 상황에서는 계층 간 충돌이 첨예화되고 자칫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우리 사회는 양극화되어 있다.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질 뿐만 아니라 이들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지식인 사회도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갈려서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지속가능성이 뿌리 채 흔들리게 된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지속가능한 사회를 꾸려나가기 위한 선결과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두 가지 돌파구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사회복지를 대폭 확대하고, 낙수효과를 저해하는 요인을 과감하게 제거하며,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를 크게 확충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장의 공정성을 높이고 사회정의를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국민이 나누어 먹을 파이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을 때에는 모두들 분배의 공정성에 더욱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수출증대 혹은 고도성장의 미명 아래 대기업의 비리를 적당히 눈감아줄 수 있었지만, 국민이 잔뜩 예민해지는 초저성장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의 골목 상권 침해와 같은 시빗거리들이 줄이어 터지면서 우리 사회가 시장의 공정성 시비에 더욱 더 깊이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초성장사회일수록 정의에 대한 요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의의 출발점은 대중의 분노이며, 정의 목적은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해소하는 것이다.

앞으로 초저성장 시대가 불가피하다면, 사회복지의 대폭 확충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문제를 놓고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회복지 확충의 문제를 단순히 예산상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제민주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요즈음 여당이나 야당이나 한결 같이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물론,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시장의 정의다. 경제성장의 시대에는 시장 거래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초저성장 시대에는 시장 거래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잠재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의의 문제도 좀 더 큰 틀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 한 대형 마트 풍경. ⓒ뉴시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