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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프로야구, '진보'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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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프로야구, '진보'가 사라졌다?

[배지헌의 그린라이트] '보수'의 득세, 팀컬러가 사라진 프로야구

'3無' 대선이다. 연말 대통령선거가 전선과 정책과 이념이 사라진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우선 기존 여야로 확연하게 구분되던 전선이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대선 때마다 등장하던 '행정수도 이전', '한반도 대운하' 등의 굵직한 정책도 이번 대선에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선거철이면 늘 등장하던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대립각이 실종됐다. 세 가지가 사라진 자리는 예능프로그램과 콘서트가 대변하는 '이미지' 정치가, 무차별 네거티브 공세가 대신 채우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3파전을 이룬 세 후보들 간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후보는 하나같이 보수 내지는 중도보수 쪽에 속한다. 정책에 있어서도 경제민주화, 복지 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보수 후보가 득세하는 가운데 진보는 대선 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된 모양새다. 2002년 대선 당시 '부유세', '무상 의료'를 내세운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이회창, 노무현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던 때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누구를 뽑든지 서민, 노동자 계층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진보가 사라진 건 정치판만의 일이 아니다. 프로야구에도 '진보'가 사라졌다. 진보의 빈자리는 보수가 가득 채웠다. 비슷비슷한 정책과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대선 구도처럼, 프로야구도 대동소이한 야구를 하는 팀들끼리 고만고만한 대결을 벌인다. 프로야구판 '보수화' 현상이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2012년 프로야구에서 펼쳐진 경향이 그랬다.

▲올해 프로야구에서 팀 간 색깔의 차이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롯데의 야구와 SK의 야구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박준서가 5회초 무사 2루 상황에서 희생번트를 시도하고 있다. ⓒ뉴시스

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미국의 웹사이트인 비욘드 더 박스스코어 닷컴(http://www.beyondtheboxscore.com) 필자 제이콥 페터슨(Jacob Peterson)이 고안한 TMI(감독 보수성 지수)를 통해서다. TMI는 Traditional Manager Index를 줄인 말이다. 말 그대로 감독이 얼마나 전통적인 스타일의 야구를 하는지 보여주는 지수다. 계산법은 매우 간단하다.

TMI(감독 보수성 지수)=SH(희생번트)+IBB(고의볼넷)

복잡한 계산도 필요없이, 그냥 팀의 희생번트 수와 고의볼넷 수를 더하면 끝난다. 어째서 번트와 고의볼넷이 보수적인 스타일로 분류될까. 희생번트는 두점, 석점이 아닌 단 한 점을 내기 위해 사용되는 작전이다.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소극적인 작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고의볼넷 역시 상대에게 한 점도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사용된다. '한 점'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는 신중한 작전이라는 점에서 희생번트와 고의볼넷만큼 '보수적'인 작전도 없다. 무엇보다 두 작전은 야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고, 검증된 작전이며, 감독이 얼마만큼 경기에 깊숙이 '개입'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전이기도 하다.

가령 지난해 메이저리그의 예를 보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높은 TMI를 기록한 감독은 플로리다 말린스의 노장 감독 잭 맥키언으로, 시즌 중에 팀을 맡은 그는 162경기로 환산했을 때 131의 TMI를 기록했다. 또 스몰볼로 유명한 아지 기옌은 97의 TMI로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반면 선수들에게 맡겨두기로 유명한 테리 프랑코나(보스턴)는 33, 애리조나를 이끈 커크 깁슨은 32로 가장 낮은 TMI를 마크했다. 이처럼 감독의 성향과 팀 구성에 따라 TMI 수치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011년 아메리칸 리그 TMI는 여기(http://goo.gl/fiPH5)서 볼 수 있다. 내셔널리그는 여기(http://goo.gl/FtTzR)

그렇다면 한국 프로야구에서 TMI 지수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다음은 올 시즌 프로야구 8개 구단의 TMI 수치를 보여주는 도표다. (10월 4일 기준)

ⓒ배지헌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높은 TMI를 기록한 팀은 선동열 감독이 이끈 KIA 타이거즈다. 올 시즌 KIA는 야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공격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선 감독은 총 132회의 희생번트를 시도하면서 그야말로 점수를 '짜내는' 보수적인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KIA의 뒤를 잇는 팀은 '메이저리그식 야구'를 표방한 이만수 감독의 SK. 그러나 감독의 공언과는 달리 SK의 야구는 김성근 감독이 이끌던 지난해까지의 스타일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여전히 희생번트는 리그 상위를 다툴 만큼 자주 나왔고, 선발투수들은 긴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고 불펜에 마운드를 물려줬다. '메이저식 야구'는 덕아웃에서의 화려한 세레모니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는데, 메이저리그에도 그렇게 격렬한 액션을 보여주는 감독은 없다. 이만수 감독으로서는 감독직을 맡기 전에 품은 '이상'과 실제 감독이 되어 온갖 압력과 부담감 속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 '현실'의 차이를 깨닫는 시즌이 되었을 것이다.

롯데는 지난해와 비교해 희생번트가 크게 늘어난 팀이다. 2011년에는 희생번트 61개로 8개구단중 가장 적은 수치를 기록했는데, 올해는 107개로 세 번째로 많은 수치를 보였다. 이대호의 공백과 주전 타자들의 부진, 불펜 강화 등이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두산의 크게 늘어난 희생번트 숫자다. 작년 73개였던 번트가 올해는 100개로 늘었다. 두산 역시 타격부진으로 점수를 내는데 크게 어려움을 겪은 팀이다. 또한 투수 출신인 김진욱 감독의 수비 지향적인 성향도 전임 김경문 감독과 큰 차이를 보인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롯데와 두산의 변화는 올 시즌 프로야구의 특징 –팀 컬러가 사라지고 보수적인 경기 운용이 주를 이루는- 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롯데와 두산은 리그에서 가장 특색있는 야구를 하는 팀에 속했다. 김성근 감독의 SK를 대척점에 놓고, 로이스터 감독의 롯데와 김경문 감독의 두산은 정반대 스타일의 색깔이 분명한 야구를 뚝심있게 펼쳐 보였다. 여기에 강한 투수력을 바탕으로 하는 조범현(전 KIA), 선동열(전 삼성) 감독의 야구가 각축을 벌이면서 프로야구를 다채롭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이들 사령탑이 건재하던 2009년과 2010년의 구단별 TMI 수치는 다음과 같았다.

ⓒ배지헌


2009년의 경우, 가장 TMI 수치가 낮은 두산(33)과 1위 SK(162)의 TMI 차이는 무려 5배수에 달했다. 두산 외에도 한화와 삼성 등이 SK의 반대편에서 '다른 야구'를 구사했다. 2010년 역시 마찬가지다. TMI 최하위인 두산(60)은 1위 SK(174)와 극단적인 차이를 나타냈다. 로이스터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휘했던 롯데도 나름의 팀컬러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갔다. 그 시절의 야구는 서로 다른 컬러를 가진 팀끼리 만나서 빚어지는 충돌, 서로 물고 물리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화학작용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상대가 가위를 내면 주먹으로 받아치고, 주먹을 내면 보자기로 덮어씌우는 치열한 지략 대결이 야구의 재미를 더했다. SK가 독주하는 가운데 다른 팀들은 때로는 SK를 따라하면서, 때로는 SK와 반대로 가면서 지독한 경쟁을 벌였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올 시즌은 전혀 딴판이다. 하향 평준화 논란 속에서 8개 구단 가운데 어느 팀도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초보 감독들끼리 시행착오를 겪는 와중에 '누가 더 잘하나'가 아닌 '누가 덜 못하나'를 두고 겨루는 모양새였다. 김성근-김경문으로 대표되는 리그를 이끌어갈 '리더'가 퓨처스리그로 사라진 가운데, '발야구' '지키는 야구' '노피어' 등 프로야구를 화려하게 수놓은 팀컬러도 실종됐다. 그 자리는 희생번트로 대표되는 가장 안전하고 '눈앞의 1승'에 도움이 되는 작전이 대체했다. 앞서 언급한 올 시즌 프로야구의 TMI 리그 평균값은 119.8이다. 가장 높은 KIA도, 가장 낮은 수치를 보인 넥센도 리그 평균값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8개 구단이 전부 '비슷비슷한' 야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 야구인은 "프로야구 전반기 관중폭발을 이끈 힘은 치열한 순위 다툼이었다"고 했다. "경기 내용만 보면 예년보다 재미가 덜한 게 사실이다. 단적으로 말해 8개 구단이 전부 똑같은 야구를 하고 있다. 팬들이 흥미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공교롭게도 후반기 들어 프로야구 관중은 전반기에 비해 30% 이상 줄어들었다. 진보 정치가 사라지고 보수 후보끼리 경쟁하는 지금의 대선이 '한국 정치의 위기'이듯, 똑같은 컬러를 가진 팀끼리 하향평준화 경쟁을 벌이는 지금의 프로야구도 위기가 분명하다. 하지만 700만 관중의 요란한 거품 속에서, 문제의식도 해결책도 보이지 않고 있다.

www.futuresb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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