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광장을 변신 로봇들이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광경이 떠올랐다. 레닌이 울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제가 대중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아무리 자유로울 수 없다 한들, 여기까지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긴 하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모스크바 영화제' 개막작 <트랜스포머 3>ⓒ프레시안 |
영화제의 개막작은 한마디로 영화제의 얼굴이다. '어떤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했느냐'에 따라 그해 영화제의 정치성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칸 영화제'는 늘 자신들을 중심으로 반(反) 할리우드 전선을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내 비(非) 메이저들과 연합전선을 꾀하려고 한다. 올해 '칸 영화제'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선택한 것은 그 같은 고육지책(苦肉之策)때문이었다. 아무리 '칸'이라 한들 때로는 미국과 '찰싹' 달라붙는 경우를 선보이기도 하는데 2008년 <다빈치 코드>를 개막작으로 선정할 때가 그랬다.
국내 영화제들 역시 개막작을 선정하는 데 있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개막식에는 적게는 1000명에서 많게는 5000명까지 관객이 모인다. 관객들 성향이 천차만별이다. 영화를 아주 잘 아는 마니아 급 관객들도 있지만 한해 영화를 한두 편 볼까 말까 하는 사람들도 있다.
2000년 '제5회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작'은 인도 부다뎁 다스굽타 감독의 <레슬러>였다. 개막작 상영이 끝나고 부산 해운대구 수영만 야외 상영장 밖으로 쏟아져 나오던 사람들 표정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떠다녔다. 돈을 들여, 힘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하지 않느냐는 얘기들이 새어 나왔다. 작품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인도영화가 너무 빨랐다. 영화 문법이 생소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왜 부산이 인도영화를 선택했는지는 이해가 갔다. 부산은 아시아 영화제의 특구를 지향해 왔다. 당시에는 영화제 초기였던 시기다. 의도적으로라도 그 지향점을 과시해야만 했었다.
오는 7월14일 열리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 7월14일 열리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프레시안 |
선택한 개막작도 인도영화 <발리우드 위대한 러브스토리>다. '부천 국제 영화제'라 하면 판타지, SF, 공포영화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장르영화들이 대거 포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제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작품들이 망라된다.
이번에 인도영화를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정치적 포석을 짙게 깔고 가는 것으로 분석된다. 마치 아시아 영화권을 장악하고 있는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한 일종의, 그리고 선의의 선전포고처럼 느껴진다. '부천 영화제' 스스로도 마니아 영화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더 많은 대중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내심으론 '부산 영화제'처럼 좀 더 아시아 영화권에 다가서겠다는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부천 국제 영화제'보다 단 일주일 앞서 열리는 '제13회 서울 국제 청소년 영화제'의 개막작은 네덜란드 영화 <네덜란드에서 가장 힘센 사나이>다. 싱글맘과 살아가는 한 소년이 아빠에 대한 환상을 좇아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일종의 성장영화로 청소년 영화제의 정체성과 부합되는 작품이다. 지난 2월 열린 '베를린영화제' 공식 초청작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에서 보면 이른바 세계 빅3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의 작품을 가져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영화제 역시 개막작을 통해 자신들이 국제적 행사에 어깨를 견주며 나아가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강했을 것이다. 개막작 선정은 그렇게 늘, 전시용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열렸던 '전주 국제 영화제'의 개막작이 이란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였던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이 영화는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곰 상을 받았다. '전주 영화제'는 이 작품을 개막식에 끌어 오기 위해 아예 판권구매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권구입을 통해서라도 세계 유수 영화제의 화제작을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름값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지다.
개막작 선정을 놓고 국내 영화제들 사이에서는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때론 충돌하고 때론 타협하며 때론 조율한다. 한해 영화제의 '장사'는 개막작 한편으로 결정이 난다. 대중들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알 필요가 없는 얘기이기도 하다.
다만, 개막작 한편이 그해 해당 영화제가 가져가는 전체 프로그램의 성격을 좌우한다는 것, 그것만큼은 유의해서 볼 일이다. 8월에 열리는 '제천 국제 음악 영화제'와 10월에 열릴 '부산 국제 영화제'의 개막작이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이 글은 포털 daum이 운영하는 '엔터 미디어'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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