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잃은 듯한 올해의 날씨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역대 최악의 폭염'으로 기록된 1994년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그해 전국에서는 무려 29.7일 동안이나 33도 이상의 고온이 이어졌다.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 수가 3384명으로 날씨 자체가 테러였다. 37.8도로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한 청주를 비롯해 각 지역별 역대 최고기온 기록이 모두 1994년에 세워졌다. 그해 발표된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의 첫 소절은 이렇다. '이젠 버틸 수 없다고'.
버틸 수 없기는 프로야구 선수들도 마찬가지. 야구를 가만 앉아 보기도 고통스러운 날씨에, 운동장 위에서 햇볕을 통으로 맞아가며 뛰어다니고 공을 던지는 건 보통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폭염 속에 뛰는 선수들은 '체중이 쭉쭉 빠진다',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특히 노장이나 경험이 부족한 신인급 선수들에게 폭염은 류현진보다도 더 타율을 떨어뜨리고, 이승엽보다도 더 방어율을 망쳐놓는 적수다. 18년 전과 올해의 폭염은 프로야구 판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1994년에는 무더위가 일찌감치 6월 중순부터 찾아왔다. 6월 14일에 처음 33도 이상을 기록한 뒤 8월 20일이 되어서야 더위가 한풀 꺾였다. 그해 6월 14일 전까지, 8개 팀 가운데 단독 1위는 '신바람' LG였다. LG는 34승 19패로 2위 해태를 5게임 차로 따돌리고 1위를 질주했다. 이어 해태가 29승 2무 24패로 2위, 태평양이 28승 2무 24패로 3위, 한화가 27승 1무 27패로 4위였다. 반면 삼성, 롯데, OB는 지지부진한 경기를 펼치며 중하위권에 처졌고 쌍방울은 17승 1무 34패로 그들만의 야구를 펼치고 있었다.
두 달간의 폭염이 휩쓸고 지나간 뒤. 순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994년 8월 21일 프로야구 순위표를 보면 극적인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우선 1위였던 LG는 66승 38패로 여전히 1위를 지켰다. 폭염 기간 추가한 승수는 22승. 이광환 감독의 철저한 투수분업화는 한여름 마라톤 속에서도 팀이 경쟁력을 계속 유지하는 밑거름이 됐다. 반면 2위였던 해태는 22승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51승 2무 50패로 5위까지 순위가 떨어져 내렸다.
가장 극적인 상승세를 보여준 팀은 한화로, 한화는 해당 기간 27승을 추가하며(1위) 54승 1무 48패 전체 3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힘을 보여줬다. 또 태평양 역시 25승을 추가해 53승 3무 44패로 단독 2위로 올라섰다. 대구구장 바닥에 프라이팬을 깔아놓은 삼성 역시 25승을 추가해 해태를 제치고 4위에 등극했다. 이들 중 삼성은 막판 부진으로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일단 한번 치고 올라가는데 성공한 태평양과 한화는 시즌 끝까지 2위와 3위 자리를 지켜냈다. 폭염 기간의 팀 성적이 프로야구 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1994년 프로야구 순위 6월 14일 이전 -> 8월 21일 LG 트윈스 34승 0무 19패 -> +22승 (1위) 해태타이거즈 29승 2무 24패 -> +22승 (5위) 태평양돌핀스 28승 2무 24패 -> +25승 (2위) 한화이글스 27승 1무 27패 -> +27승 (3위) 삼성라이온즈 26승 1무 27패 -> +25승 (4위) |
▲더위가 보약? 삼성 라이온즈는 올 여름 폭염 기간 순위를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반면 '내팀내'(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뜻의 야구계 은어)를 실천한 팀은 올해도 있었다. 예상되던 팀이 주인공. ⓒ뉴시스 |
삼성의 뒤를 따르는 팀은 두산. 두산은 같은 기간 21승을 더하며 49승 1무 42패로 시즌 초에 비해 부쩍 탄탄해진 전력을 과시하고 있다. 선발투수들의 호투 속에 팀 평균자책은 4.14에서 3.89로 내려갔고, 팀 151득점은 KIA와 함께 해당기간 2위다. 두산 역시 삼성처럼 2군 시스템이 잘 갖춰진 팀이고, '다른 팀에 가면 당장 주전'이라 불리는 선수가 즐비한 팀이기도 하다.
KIA도 폭염 동안 18승을 추가해 순위를 5위(5할 승률 +1)까지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 기간 KIA는 팀타율은 .258에서 .264로 올랐고, 팀 평균자책도 4.35에서 4.20으로 향상됐다. 또 폭염 이전까지는 226득점-263실점으로 득보다 실이 많은 경기를 했지만, 6월 18일 이후로는 151득점 129실점으로 수지를 맞추는데 성공했다. 부상 선수가 줄을 잇는 팀 사정에도 무리하지 않고 시즌 중반 이후를 겨냥한 선동열 감독의 시즌 운용이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기간 17승을 더한 롯데는 3.86에서 3.69까지 내려간 팀 평균자책이 선전을 펼친 비결.
이들 팀과는 반대로 폭염 속 승수 추가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한 팀들도 있다. 시즌 초반 센세이션을 일으킨 넥센은 6월 18일 이후 15승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팀 순위가 6위까지 떨어졌다. 홈런은 20개를 때려냈지만 팀 타율은 .257에서 .254로 내려갔고 136득점에 141실점으로 역마진을 내고 말았다. 부상자가 속출한 SK 역시 팀 평균자책이 3.71에서 3.99까지 폭등했고 139득점에 163실점으로 점수를 까먹으며 13승 추가에 그쳤다. 1위였던 순위도 어느새 4위까지 내려갔다.
폭염 기간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인 팀은 1994년에는 1위였던 LG 트윈스. LG는 이 기간 단 9승을 더하는데 그치며 팀 순위가 2위에서 7위까지 떨어졌다. 3.86으로 준수했던 팀 평균자책은 4.23까지 치솟았고, 그 사이 팀 홈런은 14개에 그쳤다. 게다가 득점은 129점에 불과한 반면 168실점으로 해당 기간 최다실점의 불명예까지 안았다. LG는 애초에 전력이 두텁지 못한 상태에서 시즌을 맞이했기에 여름 성적이 시즌 순위를 좌우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한계가 명확한 투수진에 봉중근 이탈 사태까지 겹치면서 무더위를 무사히 넘기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최근 놀랄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한화는 폭염 기간 15승을 추가했는데, 4.96이던 평균자책을 4.71로 낮춘 것이 긍정적인 부분이다.
2012년 프로야구 순위 변화 6월 18일 이전 -> 8월 7일 현재 SK 와이번스 32승 1무 23패 -> +13승 (4위) LG 트윈스 29승 2무 26패 -> +9승 (7위) 넥센히어로즈 29승 2무 26패 -> +15승 (6위) 롯데자이언츠 28승 3무 26패 -> +17승 (3위) 두산 베어스 28승 1무 27패 -> +21승 (2위) 삼성라이온즈 29승 1무 28패 -> +22승 (1위) KIA 타이거즈 24승 3무 28패 -> +18승 (5위) 한화 이글스 21승 1무 36패 -> +15승 (8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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