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은 올림픽 국가주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 동독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통해 국민의 결속력을 다졌고,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었다. 라이벌 서독을 넘어 동독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선수들에게 약물복용을 권장했고, 선수들은 메달 따는 기계로 전락했다. 올림픽 국가주의의 전형적인 폐해다.
한국도 올림픽 국가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스포츠 무대에서 남북대결이 본격화된 1970년대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먼저 딴 쪽은 북한(1972년 뮌헨올림픽)이었다. 그 뒤 한국은 올림픽에서 앞만 보고 내달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양정모를 필두로 많은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서울에서 펼쳐진 1988년 올림픽에서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금메달을 땄다. 그 뒤 한국은 우리가 따낸 올림픽 메달 숫자만을 보며 환호했고, 이 과정에서 언론은 '올림픽 광란'을 부추기는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물론 이런 '올림픽 집착증' 덕에 스포츠 코리아는 초고속 성장을 이룬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를 넘어섰다는 게 문제였다.
한국은 어떻게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했을까?
그렇다면 한국은 왜 이렇게 올림픽에 집착했을까? 1948년 런던올림픽이 그 해답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원래 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일단 관례상 정부수립도 되기 전에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IOC로부터 승인을 받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주의 열병을 앓았던 해방공간의 한국은 이 관문을 열정으로 넘어섰다. 체육계는 올림픽 종목 5개 이상의 경기단체가 국제경기연맹에 가입돼 있어야 IOC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빠르게 그 작업에 착수했다.
런던올림픽 참가 대책위원회 부회장이었던 이상백과 전경무는 미국 출신의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 부위원장을 만나 끊임없이 설득작업을 펼쳤다. 그들의 열정에 브런디지 부위원장은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부탁을 했고, 맥아더는 다시 존 하지 한국 주둔군 사령관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눈물겨운 노력으로 한국의 런던올림픽 참가는 1947년 6월 확정됐다.
▲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의 입촌식 장면. ⓒ독립기념관 |
이 와중에 한국 체육계는 잇따른 체육회 고위 인사의 사망으로 초상집이었다. 전경무는 1947년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 참석을 위해 가던 중 5월 29일 비행기 사고로 애석하게 사망했다. 여운형 체육회 회장은 정치적 문제로 7월 19일에 암살됐다. 여운형에 이어 체육회 회장에 오른 유억겸 회장도 11월에 유명을 달리했다.
경비조달을 위한 국민들의 성원
이제 남은 문제는 선수단의 올림픽 참가 경비를 어떻게 충당하느냐였다. 묘안이 나왔다. 한국 복권의 효시가 된 올림픽 후원권 발매였다. 장당 백원에 판매된 후원권의 1등 상금은 100만 원이었다. 춥고 배고팠던 시기였지만 국민들의 성원은 뜨거웠다. 무려 100여만 장이 팔려 그 수익금으로 8만여 달러가 모였다.
▲ 1948년 런던올림픽 후원복권. ⓒ문화재청 |
국도극장에서는 올림픽 후원 대춘향전 공연도 열렸다. 1948년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국악원 국극사(國劇社) 주최로 열린 이 공연은 흥행도 성공적이었다. 공연의 모든 수익금은 올림픽 후원회에 기증됐다. 한국 올림픽 열풍의 시작이었다.
한국 선수들과 영국인이 술집에서 싸운 사연
신생독립국 한국의 이름을 올림픽 축제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노력은 올림픽 참가로 일단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지인들은 아직 한국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런던 북서부 억스브리지의 술집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맥주를 마시기 위해 한국 선수들은 이 술집을 찾았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패전국 일본이 초청받지 못했지만 주민들은 한국 선수들을 일본 사람으로 착각했다. 2차 대전 기간 중 잔인한 살육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은 그대로 표출됐다. 곧 시비가 붙었다.
한국의 레슬링과 복싱 대표 선수들은 시비를 거는 영국인들을 차례로 혼쭐을 내줬다. 순식간에 영국인들은 술집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급하게 경찰이 출동해 한국 선수들을 숙소로 이동시켜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현지 언론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던 이 사건은 2008년 발간된 제이니 햄프턴의 <궁핍한 올림픽>(The Austerity Olympics)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됐다.
축구 선수들의 월북 사태를 조장한 편파적 올림픽 대표 선발
적어도 10명의 한국 축구선수들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다. 편파적 선수 선발 때문이다. 한국 축구 대표선수들은 대부분 30세를 넘긴 노장들이었다. 팀으로만 보면 조선전업과 조일양조 소속 선수들이 그 중심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름을 날렸던 노장 선수들은 올림픽에 반드시 자신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대학교에 재학중인 젊은 유망주들은 철저히 버림받았다. 실제로 한국 대표팀은 런던올림픽에 가기 전까지 제대로 된 합동 훈련 한 번 못했다. 원칙 없이 주변의 입김에 휘둘린 선수 선발 때문에 서로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5-3으로 승리했다. 현지 언론도 깜짝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런던올림픽에서 축구 금메달을 딴 스웨덴에는 12-0으로 참패했다. 사실 스웨덴은 한국과의 경기 직전 한국을 상당히 경계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스웨덴이 일본에 패했기 때문이었다. 스웨덴은 그 경기에 한국의 김용식 선수도 맹활약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너무 많은 골을 내주면서 패해서인지 국내 언론은 스코어 자체를 11-0으로 오보했다. 선수들도 나중에 정확한 스코어를 기억하지 못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뒤 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1948년 9월 런던에 가지 못한 젊은 축구 선수들이 북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그저 홧김에 친선 경기 몇 경기를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출전한 건 북한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축구대회였다.
한수안의 영광스런 동메달
한국은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 2개를 따냈다. 기적적인 결과였다. 그 가운데 권투 플라이급에 출전한 한수안이 따낸 동메달은 남다르다.
한수안은 준준결승에서 양쪽 고막을 다쳤다. 한수안은 다음 날 준결승 경기시간마저 오후 8시로 착각해 쉬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 시간은 오후 5시. 한수안은 부랴부랴 연락을 받고 점심도 거른 채 경기에 출전했다. 최악의 컨디션임에도 한수안은 선전했다. 상대 선수 이탈리아의 반디넬리도 반칙을 세 차례나 범해 한수안의 결승 진출이 목전에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반디넬리의 판정승이었다. 선수단의 항의가 있었지만 판정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한수안을 플라이급의 최강자로 평가했던 현지언론은 한수안이 패하자 "이상한 판정 결과"라고 보도했다.
▲ 런던올림픽 권투 플라이급 준결승에 오른 한수안 선수의 경기 장면. ⓒ연합뉴스 |
하지만 한수안의 동메달은 '아쉬운 동메달'이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따낸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동메달이었다. 세계 3위 선수에게 아쉽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사실 실례다. 1975년 체육연금 수혜자들을 대상으로 국내 한 신문에 연재됐던 기사의 제목도 '영광의 메달과 나'였다. 그때까지 한국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아쉬운 동메달'이란 표현이 일반화된 것은 1988년 올림픽 때부터다. 어느새 금메달만 대접 받게 된 한국 스포츠 현실에서 한수안과 같은 '구릿빛 영웅'이 또 나올 수 있을까?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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