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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이 입원하면 게이가 '남편'이라고 써주고…"

[성소수자의 의료 이용 불편기·上] 혈연 중심 보호자 제도에서 소외되는 사람들

오는 8월 2일부터는 전국 모든 병의원이 접수창구와 응급실 벽에 '환자의 권리와 의무'를 액자 형태로 게시해야 한다.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령안에 따르면, 환자는 △성별·나이·경제적 조건으로 진료에 차별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질병과 치료 방법에 대해 의료진에게 충분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비밀을 보장받고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서 피해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로부터 여전히 거리가 먼 환자들이 있다. 바로 성소수자들이다. 이들은 △배우자가 '법정 보호자'가 아니어서 수술을 거부당하고 △자신의 질병과 치료 방법에 대해 의료진과 툭 터놓고 상담하기 어려우며 △진료 수속을 밟을 때부터 자신의 신원이 노출될까봐 노심초사해야 하고 △수술이 잘못돼도 어디 가서 호소하기 어렵다.

<프레시안>은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을 맞아 '성소수자의 의료이용 불편기'라는 주제로 병원에서 소외된 경험이 있는 성소수자들을 만났다. <편집자>

김은희(가명) 씨와 이지원(가명) 씨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지난 2008년 김은희 씨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김 씨는 항암치료를 받은 뒤 방사선치료 3개월 과정을 밟고 집에서 요양했다. 이 씨가 김 씨를 간병했다.

치료가 끝난 뒤 환자의 보호자가 주치의를 만나야할 자리가 있었다. MRI 판독 결과를 통해 종양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병원에서는 아픈 환자가 번거롭게 오는 대신 보호자만 와서 설명을 들으라고 했다. 이 씨는 자신이 '보호자'임을 인증해야 했다.

주치의가 환자와의 관계를 물었을 때 이 씨는 '사촌'이라고 대답할 계획이었다. 가급적이면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연습도 했다. 그는 "직계 언니, 오빠들이 시간이 없어서 사촌인 내가 그동안 환자를 간병했다"는 말을 되뇌었다. 병원 문 앞에 선 이 씨는 짧게 심호흡했다. '연습했던 대로만 하자.'

막상 의사 앞에 서자 이 씨는 얼었다. MRI 사진을 보여주던 의사가 보호자가 맞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얼떨결에 "후배"라고 대답해버렸다. 주치의는 "가족이 와야 설명할 수 있다"며 사진을 내렸다.

그때부터 온갖 설득이 시작됐다. "나는 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서 환자의 상태를 가장 잘 안다", "환자와 친자매 같은 사이다", "설명을 듣고 나면 가족들에게 다 전해주겠다"는 애원이 뒤따랐다. 떨떠름한 의사를 설득해 가까스로 설명을 듣고 병원을 나오는 길이 그는 서글펐다.

"병원을 나오면서 고독함이 느껴졌어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누군가가 항상 내 등 뒤에서 손가락질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간호사들은 '늘 붙어서 간병해서 동생인줄 알았는데 아니네'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의아하다는 거예요."

"병원에서도 성소수자 존재 인정되지 않아"

금전적으로 보든 간병에 대한 기여도로 보든, 이 씨는 김 씨의 보호자였다. 그는 100일 동안 아픈 김 씨를 데리고 꼬박 병원에 갔고, 입원한 김 씨를 도맡아서 간병했다. 한 달에 200~300만 원씩 8개월 동안 총 2000만 원의 치료비를 지인들로부터 모금해 직접 부담하면서 어떤 치료를 할 것인지도 실질적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씨는 간병하거나 치료비를 대면서도 김 씨의 가족과 병원으로부터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병원 치료와 관련한 형식적인 결정에서는 김 씨의 가족에게 의지해야 했다.

"통장을 내가 가지고 있다보니 치료방식은 가족들과 상의해서 같이 결정했지만 형식적인 것들, 병원에서 기록 떼 달라고 할 때, 언제나 (김 씨의) 형부나 친언니가 와서 떼야 했어요. 입원수속을 밟을 때도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내가 가면 안 되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부딪히는 상황들이 외로웠어요."

그는 "성소수자는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병원에서도 개인에게 가해지는 낙인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니, 내 존재감이 상실되고 내면적인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했다.

"레즈비언이 입원하면 게이가 '남편'이라고 써주고…"

▲ 입원 수속을 밟는 환자와 보호자. 이 씨는 "병원이 혈연 중심의 보호자에게 의존하는 시스템은 성소수자뿐 아니라 비혼인 사람들, 가족이 없는 노숙인이나 무연고자 등 많은 사람을 소외시킨다"고 말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생겼다. 몇 년 전 몸이 약한 김 씨가 신장이 아파서 입원할 때였다. 어김없이 '입원 수속'을 하려면 가족의 서명이 필요했다. 가족과 가끔 만나기만 할 뿐 아예 따로 생활하는 김 씨가 입원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은 '함께 사는 게이 오빠'였다. 그가 가족관계란에 '남편'이라고 적어줬던 것이다.

"레즈비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게이가 남편이라고 써주고 입원하고…. 그런 웃기는 상황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가서 '남편'이라고 쓸 수는 없잖아요. 동성커플이 아프면, 멀리서 사는 잘 알지도 못하는 가족이 와서 치료가 지연되는 경우는 너무 많아요. 성소수자 중에는 혈연가족과 관계가 늘 좋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고요."

결혼식까지 치른 성소수자도 배우자가 아프면 같은 문제를 겪는다. 또 다른 성소수자는 "양가의 동의를 얻어 결혼을 했다"며 "그런데도 배우자가 입원했을 때 법적으로 보호자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내가 가족이자 보호자라고 말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동거인을 합법적인 보호자로 인정해야"

이 씨는 "병원이 혈연 중심의 보호자에게 의존하는 시스템은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비혼인 사람들, 가족이 없는 노숙인이나 무연고자 등 많은 사람을 소외시킨다"고 말했다.

현행 의료법상 의료인은 환자나 보호자에게 건강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지도하고 비급여 수술비를 미리 고지해야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본인이 승낙했을 경우 보호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보면, 법정 대리인을 대동하지 않은 환자가 의식이 없고 응급한 상황일 경우에는 의료인은 법정 대리인의 동의 없이도 수술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의료기관이 보호자를 중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보건복지부령상 환자의 질병 정보를 친족 외에는 타인에게 알려줄 수 없고, 의료사고가 났거나 수술비를 청구했을 때 분쟁이 날 것을 우려해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의료기관은 중증질환이나 비용이 많이 드는 수술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 환자의 친족이나 법정 대리인의 동의를 구한다.

법무법인 CS의 이인재 변호사는 "법적으로는 환자의 수술 요청이 있을 때 보호자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의료기관이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면서도 "그렇지만 환자가 응급하지 않은 경우에 보호자의 동의를 얻을 때까지 의료기관이 수속 시간을 늦추는 것을 위법하다고 단정하기 또한 어렵다"고 말했다.

보호자 동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박주영 건강과 대안 연구위원은 "사실혼 관계에 있으면 이성애자도 배우자가 입원할 때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라며 "의료기관을 이용하거나 의료기관에서 수술 보증을 설 때 동거인을 인정하도록 가족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시민적 결합'이라는 형태로 동거인을 합법적인 보호자로 인정하고 있다.

더 단기적인 대안으로 박 연구위원은 "보건복지부가 사실혼 관계를 인증해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방안이 있다"며 "성소수자 친화적인 의료기관에 대해서 복지부가 인증하고, 임시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면 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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