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절망' 고 노무현 대통령 붓그림 ⓒ김봉준 |
5월23일이 다가왔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서거한 날입니다. '페이스북'에 줄곧 그려온 시민의 얼굴 '님얼붓그림'에 노무현님도 그렸습니다. 그 아래에 무엇이라 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바보 노무현'이라 썼습니다. 만인이 그렇게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이니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 보통 시민의 소박한 꿈을 담은 김봉준 페이스북의 '님얼붓그림들' ⓒ김봉준 |
세상이 뭐라고 하던 평생 자기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라서 부쳐진 애칭일 겁니다. 요령 것 살지 않고 많은 사람이 안 된다고 생각한 일을 되게 하려고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치한 것을 후회하고 절망하며 죽어갔습니다. 그는 무슨 꾀를 내어 난처한 국면을 모면하려고 선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조차도 그랬습니다. 세상에 절망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앞이 캄캄하다며 죽음을 택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출구를 못 찾고 바보처럼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했었을 겁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까지 오른 출세자도 절망하게 만드는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법대로'이고, 너 죽고 나 살자 식 끝장 싸움이고, 근거도 없는 조롱으로 파국까지 가고야 끝이 납니다. 국민 스스로 세운 권위마저 허무는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비주류의 배재전략입니다. 주류사회 문화- 정치가, 3부 관료, 언론, 대기업 경영인들 문화가 특히 이상한 원리주의 종교같은 이념문화를 가진 나라입니다.
정치는 공적 가치와 정책합의를 찾지 못하고 싸움이 금도를 넘었고, 경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노동자와 동반성장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공교육은 창의교육을 열지 않고, 문화예술은 서구의 좀비문화로 채우고도 자기 것 인 양 착각하며 뻐깁니다. 한국의 주류문화는 창조적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정치는 너무 살벌하고 경제는 너무 인정머리 없이 잔인하고 사회는 팍팍하고 문화예술은 풍류를 잃었습니다. 놀 줄도 모르고 토론문화도 없고 원칙과 상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 이러면 남는 것은 절망뿐인 사회입니다.
한국사회는 식민지와 전쟁, 국제전이 되 버린 복마전 판에서 주어진 삶조차도 사생결단으로 살라고 일방을 강요해 왔습니다. 남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고 다름을 이해하기보다 속 좁은 마음, 째재한 품성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건너지 말아야할 강을 건너버린 항구적 대립, '두 국민 한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한 지붕 밑에서 화목을 모르는 두 살림처럼 '두국민국가주의'입니다. 차라리 헤어져서 여러 지붕 만들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형식을 갖춘다면 모를까.
한 나라 아래서 뽑아 놓은 대표자를 인정하지 않고 흔들었습니다. 민주사회에서 권위는 법과 통치권력으로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제일 하치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존경심을 갖게 될 적에 권위는 저절로 생깁니다. 권위는 높은 문화적 자긍심의 외형에 불과합니다. 사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지만 복지와 분배의 동반성장을 외면했고 민주화를 이루었다지만 법제도를 형식으로만 갖추었지 민주의 내용을 배재한 사회에서는 존경과 권위를 만들 수 없습니다.
'바보 노무현'이 아니라 이 사회가 바보사회였습니다. 살아남은 기성사회인 우리가 바보였습니다. 소통할 줄 모르고 감동할 줄도 모르고 합의 할 줄도, 약속을 지킬 줄도 모르고 보통 시민의 소박한 꿈도 못 담는 이런 사회가 바보사회입니다. 한 지붕을 부수고 여러 지붕 만들어 살던지, 아니면 합의민주주의 사회로 가는 것 말고 달리 길이 없습니다. 합의민주주의는 소수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결로 결정하면 그만인 사회가 아닙니다. 소수자를 바보로 만들지 않고 비주류를 끝까지 왕따 시키지 않는 다원의 공존사회입니다.
소수자의 개성과 창의력들이 모이고 비주류가 주류와 합류한다면 현상고착의 사회는 언제나 창조적 사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정말 바보는 다원성과 창조적 비판정신을 인정 하지 않는 한국의 주류사회입니다. 서로 가진 역량마저 소진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바보 사회'에 대한 위대한 절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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