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지적이다. 음식점이나 찻집 등이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서 오히려 추웠던 경험이 기자도 종종 있다. 더울 때는 조금 덥게, 추울 때는 조금 춥게 지내는 게 순리다. 불필요한 냉‧난방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를 막는 일은 정부가 꼭 해야 할 역할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대형 범죄가 발생하면 일선 경찰서를 전격방문해서 꾸짖는 식의 리더십은 변하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 때문이다.
범죄는 늘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대통령이 경찰서를 쫓아다닐 수는 없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은 음식점이 한두 곳이 아닌데, 대통령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종업원을 다그칠 수도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통령이 할 일은 따로 있다.
사람들이 전기 귀한 줄 모르고 에어컨을 마구 트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손님이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정도로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내듯, 냉방이나 난방도 필요 이상으로 하는 걸 예의로 여기는 문화가 있다. 앞서의 음식점 주인이라면, 과도한 냉방이 대통령 방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런 문화는 분명히 잘못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다른 변수가 더 중요하다. 대표적인 게 가격 변수다. 그리고 이런 변수를 제대로 다루는 게 대통령과 정책 당국자가 할 일이다.
그동안 한국에선 전기요금이 너무 쌌다. 가격이 싸면 낭비가 당연하다. 쉬운 예가 있다. 겨울에 흔히 쓰는 전열기(전기히터)다. 우리는 석탄이나 석유를 태워 열을 낸 뒤, 그걸로 증기를 만들어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얻는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 손실은 필연이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전기를 다시 열로 바꾼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열을 전기로 바꾸고, 그걸 다시 비용을 들여서 열로 바꾸는 셈인데, 에너지 효율이라는 관점에선 어리석은 짓이다. 실제로 외국에선 전열기가 한국만큼 흔하지 않다.
우리는 그런 짓을 왜 할까. 과학이나 공학 논리로는 비효율적이지만, 경제 논리로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전기요금이 원가 이하로 책정돼 있기 때문. 주택용 전기요금은 원가의 94.2%, 산업용 전기요금은 원가의 90% 미만이다. 농업용 전기요금은 원가의 40% 미만이다.
산업용 전기 요금 인상에 극력 저항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비록 몇 가지 단서를 달았지만 '전기요금 현실화'에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도 그래서다. '현실화'란 인상을 에둘러 가리키는 표현이다. 한국의 전기요금이 비정상적으로 싸며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전기의 대량 소비자인 재계 역시 부인할 수 없었던 것. 다만, 재계는 인상에 대한 부담을 가계 부문과 나눠지자는 입장이다. 산업용 전기요금만 올릴 게 아니라 주택용 전기요금도 함께 올리자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그리고 오는 30일 전기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뒤, 다음 달 초쯤에 전기요금 인상방안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진 정부 역시 재계와 비슷한 입장이다. 산업용은 6%, 주택용은 3% 이내에서 각각 인상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재계마저 전기요금 인상에 동의한 배경에는 전기 수요를 통제하지 않으면 재앙이 올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다. 지난해 9월 15일에 발생한 대정전 사태는 누구에게도 불안한 징후다.
그러나 여기서도 책임의 경중은 분명하게 가려져야 한다. 값싼 전기가 준 혜택은 누구나 누렸지만, 혜택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새누리당 김재경 의원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30개 대기업 그룹이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기요금을 할인받은 금액은 약 3조8000억 원이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된 한전의 적자 3조1000억 원을 웃도는 금액이다. 삼성이 7500억 원을 할인받아서 1위를 기록했고, 5200억 원을 할인받은 현대차가 그 뒤를 이었다.
또 민주당 노영민 의원은 당시 국감에서 "전기요금 종별 평균 판매지수(100)가 주택용은 134.5이고, 일반용(공공, 영업용)은 111.5인 반면 산업용은 89.5로 낮다"라며 "대다수 국민은 전기요금을 11.5~34.5%의 비율만큼 더 내고 기업은 10.5% 정도 덜 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력의 53%가 산업용인데,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등의 전기요금의 절반 정도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현행 전기요금 체계의 가장 큰 수혜자가 누구인지는 금세 드러난다.
바로 대기업이다. 따라서 이들의 책임이 보다 뚜렷해져야 옳다. 대기업이 값싼 전기로 원가 경쟁력을 누리는 게 왜 나쁘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라도 한국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우면 좋은 일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한전이 대기업에 전기요금을 깎아주느라 생긴 적자는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크게 보면, 대기업의 전기요금을 국민이 세금으로 대신 내준 셈이다.
물론, 대기업에 전력을 싸게 공급하는 산업정책은 현 정부만 취한 게 아니었다. 에너지 소비가 많은 중화학 공업 육성에 골몰했던 박정희 정권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다음 세대에 치명적인 부담을 안겨줄 원자력 발전을 마구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간의 혜택에 따른 책임을 물을 때가 됐다. 대기업에 대한 '묻지마 특혜'는 낙수 효과에 대한 믿음 속에서 정당화됐다. 그런데 그 믿음이 깨졌다. 공룡이 된 대기업은 낙수 효과는커녕 비정규직을 늘리고 중소기업을 수탈한다. 심지어 동네빵집, 문구점 등 영세 상인들의 몫까지 집어삼킨다. 산업용 전기요금 문제가 보다 적극적으로 공론화돼야 하는 이유다.
▲ 전열기를 판매하는 매장 풍경. 전기를 열로 바꿔서 사용하는 것은 에너지 효율 차원에선 몹시 어리석은 일인데, 한국에선 그게 자연스럽다. 원가 이하로 책정된 전기요금이 그 이유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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