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쌍용자동차 ○○씨의 2009년 10월 18일 진료 내용입니다.
2009년 쌍용차 77일 파업 중 마지막 며칠은 주먹밥 하나를 서로 나눠 먹으면서 버텼다고 들었습니다. 비위가 많이 상했겠지요. 허기와 긴장으로 지친 속이 회복되기 전이라 평소 먹던 음식에도 배탈이 났을 겁니다. 생계 걱정으로 어깨가 짓눌리고 잘린 이유를 납득할 수 없어 잠을 못 이루며 경찰 폭력에 치가 떨리고 구사대가 된 동료들에게 절망하였겠지요.
2009년 가을, 주말을 이용해 평택으로 진료를 다니기로 했습니다. 또 다른 ○○씨가 목을 매달았다는 소식을 듣고 말입니다.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살아났지만 자살을 기도한 사람이 당시에 벌써 두 번째로 생겨나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
스물 두 번째라니, 그것도 죽은 사람이…
한의학에서는 '탈영' 또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하루아침에 부귀영화를 잃고 몰락하게 되는 경우에 생기는 병을 일컬어서요. 평민이나 노비는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것도 없어 걸릴 일 없는 병이었겠으나, 그보다는 치료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들지를 못하였겠지요.
오늘 날은 어떻습니까?
용산에서 불에 타 죽은 시신은 1년 동안이나 묻히지도 못하고 냉동고에 얼려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유족들은 위로받기는커녕 살인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개발하겠다고 살던 사람들 몰아낸 땅은 수지가 안 맞는다고 버려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공대에 두들겨 맞아 집안을 기어 다니는 노동자
1971년생 ㅊ씨, 옥상으로 낙하한 경찰 특공대에게 두들겨 맞았던 사람입니다. 기절할 때까지 찍히고 맞고 밟혔는데 그 해 10월에 방문해 보니 집안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몸으로도 여성 이주노동자를 도와 남편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지요.
또 병원에서 만난 분을 모셔와 자기 집 방 한 칸을 내주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국가는 불법 파업이라 그동안 적용받았던 건강보험료 수 백 만원을 토해내라고 했다면서요.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고 들었습니다.
죽은 이가 스물둘이라면 그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죽어도 죽을 수 없듯이 살아도 산 게 아니지 않을까요? 살아달라고, 제발 죽지만은 말아달라고 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요? 생활과 생계를 잃고서도 자식을 봐서, 부모를 봐서 오늘은 버티지만 내일은 또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인가
몸이 한 번 망가지면 회복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정혜신 선생님은 "방사능에 피폭되는 것과 같다"고 하셨더군요. 살을 헤집고 뼈에 박힐 뿐만 아니라 한 번 난 영혼의 상처는 오장육부를 망쳐놓기 때문입니다. 잘리고 맞고 갇혀 억울한 심정에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아궁이인 단전에 간직되어야 할 혈기가 가슴 위로, 머리끝으로 향하니 가슴은 답답하고 뒷목이 뻣뻣해지고 눈이 빨개지며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귀가 울어 댑니다. 생계 걱정으로 밤에도 멀뚱멀뚱 잠이 안 오고 엎치락뒤치락 하건만 생각은 천리만리로 달아나다가 돌아올 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또 문득 '내가 왜 잘렸지?' 생각하니 열만 뻗지릅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열이 가슴 위로만 뭉치니 먹은 게 소화가 안 되어 끅끅거리다가 열기를 따라 신물이 올라오고 속이 쓰립니다. 반대로 배 아래로는 차디차서 아프거나 설사를 하고 빵빵하게 방구만 찹니다. 잠도 안 오고 이참에 못 다한 애정표현이라도 해보려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쌍용차 출신이라고 받아주는 곳도 없습니다. 아파트를 내놓고 전세로 갑니다. 전세 값도 없어 시골로, 고향 근처로 옮깁니다. 누굴 만나기도 싫고 만날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혼자가 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뚱아리마저도 울타리 밖, 동구 밖으로 완전히 내쳐집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프리카 평원에서 무리 밖으로 내쳐진 들소 한 마리처럼, 밤으로 애태우고 낮으로 한숨짓는 해고노동자들에게 무릎 일으켜 세울 기력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요? 가슴 펴고 앞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붉은 피는 얼마나 더 견뎌줄 수 있을까요?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살려줄 피가 더 이상 심장을 식혀주지 못하고 살아야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워줄 정이 더 이상 신장을 덥혀주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내가 치료했던 노동자의 죽음
어느 날 누군가의 차트를 찾다가 돌아가신 ○○씨의 차트를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진료를 하였구나, 아! 내가 진료를 했었구나! 약을 더 줄 걸…, 약을 한 번이라도 더 드릴 걸…. 하지만 이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남은 피붙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는 일 밖에는 어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엔진에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더 이상 달리지 못합니다. 초가 남아 있지 않으면 촛불은 더 이상 탈 수가 없습니다. 오장육부에 피가 마르고 정이 없어지면 사람은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 무리 밖으로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쌍용자동차 희생 노동자 분향소에 가서 향 한 대 피워 올린다면 향불만큼이나마 희망이 밝아질까요? 촛불 하나 들어 올린다면 떨어지는 촛농만큼이나마 핏기가 생겨날까요? 의사도 손을 쓰지 못하고 정치인도 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살릴 수 있을까요?
살아 달라고, 살아만 달라고 같이 울어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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