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당내 경선에서 총체적 부실이든, 부분적 부정이든 왜 문제가 생긴 것일까? 그것은 절차와 제도가 부실하고,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준비와 집행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당원총투표'를 제대로 진행할 역량이 없었다는 말이다. 운영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유능하지 못하다면, 아무리 좋은 절차와 제도라도 그 장점은 발휘되지 못하고 조직과 집단을 약화시킨다. 이점에서 부실과 무능은 부정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진보당 당권파는 "(비례대표 후보를) 당원이 뽑았으니, 진퇴를 당원총투표로 결정하자"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현행의 총투표 제도 자체가 부실하고, 그 제도를 운영하는 지도부와 실무자들의 역량이 부족해서, 현행 제도와 실력으로는 당원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없는 치명적 오류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당원총투표'에 집착하는 발상은 각주구검(刻舟求劍)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 통합진보당 조준호, 심상정, 이정희, 유시민 공동대표. ⓒ뉴시스 |
'당원총투표'에 대한 물신화
진보당의 상황을 보면, 부실·부정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당원총투표'에 대한 물신화(物神化)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당원의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민주적으로 대변하기 위해서 '총투표'를 하는 것이지, '총투표'를 위해 당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당권파는 총투표 자체를 자기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우는데, 부실이든 부정이든 현행의 총투표 제도와 리더십이 당원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대변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대한 이해와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당원'이라는 알맹이는 사라지고, '총투표'라는 껍데기만 남은 상황에서 '총투표'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당권파는 "당원 민주주의" 운운하지만, 당원 민주주의의 기반인 당원이 참여하는 일상 활동이나 교양 사업은 크게 부족했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당원들에 대한 당의 관심은 대통령후보나 의원후보를 뽑을 때만 반짝했을 뿐이다. 당의 일상 활동과 교양 사업을 통해 조직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당원들이 '정파들의 전쟁터'인 당직·공직 선거에 바로 동원되었다. 그렇다 보니, 당내 선거는 정파적으로 과열되었고, 부실과 부정은 무능력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당에 똬리를 틀었던 것이다.
100명의 민주주의와 10000명의 민주주의는 다르다. 100명일 때의 총투표와 10000명일 때의 총투표는 그 내용과 형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10000명 총투표는 100명 총투표보다 뛰어난 지도력과 실무력을 요구하며, 보다 정교한 제도를 요구한다. 조직 성원이 10000명, 100000명으로 늘어나면 거기에 맞게 당원들의 의사대변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대의기관이 중요하다. 소수파가 대의기관에서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 어렵다고, 대의기관의 운영을 물리력으로 저지하고 '총투표'나 '직선제' 같은 이른바 "직접민주주의"에 의지한다면, 조직 민주주의는 훼손되게 마련이다.
진보당 당헌을 보면, 최고 대의기관으로 중앙위원회가 있고, 그 다음으로 전국운영위원회가 있다. 당권파가 중앙위나 운영위의 다수파를 장악할 게 확실했다면, "당원이 뽑았으니까" 운운하면서 '당원 총투표'를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앙위와 운영위 같은 조직의 대의기관을 무력화시킬 수단으로 "당원 민주주의"를 남용한다면, 결과적으로 의사결정에서 당원은 사라지고 총투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재의 "조직 민주주의"와 "당원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위원장 직선제'를 추진하는 민주노총의 딜레마
"기층",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물신주의는 진보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는 12월 '위원장 직선제'를 추진 중인 민주노총도 같은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1998년 처음 제기된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한 '조합원 직선제'는 진보당의 당원총투표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진보당은 당원이 가입한 조직이지만, 민주노총은 조합원이 아니라 산별연맹과 산별노조 등 가맹조직이 연합한 총연맹체이기 때문이다.
당원은 당에 당비를 직접 내며 당원 관리 주체도 당이기 때문에, 당의 제도가 튼튼하고 당직자가 유능하며 당원들의 참여 수준이 높으면, 당원 직선제는 형식과 내용에서 조직 민주주의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에 조합비를 내는 노조원은 없다. 민주노총에 의무금(회비)을 내는 주체는 조합원이 아니라 가맹조직, 즉 산별노조와 산별연맹이다. 지금 민주노총의 의무금 납부율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가맹단위인 산별노조와 산별연맹의 재정 의무조차 제대로 강제하지 못하는 민주노총이 산별노조와 산별연맹에 속한 조합원들의 선거를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것인지 우려스럽다.
민주노총이 노조원을 관리하는 주체도 아니고, 60만 명이 넘는 산하 조직의 조합원들을 관리할 수도 없다. 조직이 관리하지도 않고, 관리할 수도 없는 사람들을 동원해 조직의 수장을 뽑을 수는 없으며, 그런 시도는 조직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상적인 조직에서 '조합원 직선제'로 노총 위원장을 뽑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
대의기관의 다수파를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전락
1998년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한 '조합원 직선제'가 제기된 이유는 2012년 진보당 당권파들이 '당원총투표'에 집착하는 이유와 똑같다. 소수파가 '직접 민주주의'라는 미명(美名) 하에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대의기관의 다수파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지난 4~5일 진보당 운영위원회는 당권파 당원들의 물리적 방해로 무산되어 인터넷으로 전자투표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둘러싸고 파행으로 치달았던 2005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도부 다수와 대의원대회 다수파가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소수파들이 대의원도 아닌 사람들을 동원하여 대의원대회를 폭력적으로 무산시킨 것이다.
이때도 "직접 민주주의"니 "내용적 민주주의", "평조합원의 뜻"이니 하는 논리들이 동원되었다. 다수파가 "운동·역사·민중을 배반"했기에 소수파가 정당하다는 정서적·도덕적 비판도 비슷하다. 2012년 진보당의 파행을 "NL(민족해방계열)강경파"가 주도하고 있다면, 2005년 민주노총의 파행은 "PD(민중민주계열)강경파"가 주도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대의기관 존중과 다수결 원칙 정상화 절실
지금은 "NL 강경파"가 도마에 올랐지만, "평당원"과 "평조합원"을 거론하면서 조직의 공식의사결정 구조를 훼손하고 대의기관을 무력화하려는 관행과 습성은 정파를 가리지 않는 "운동권" 전체의 문제다. 내가 주장하는 내용이 옳으면, 조직의 형식과 절차를 방해하고 무너뜨려도 된다는 태도는 현대 사회의 원리와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당이나 노동조합 같은 현대적 결사체의 공식의결 구조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보장되고 존중받지 못한다면 조직 민주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부실·부정선거 파문으로 진보당이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물론,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운동진영의 권위도 더욱 추락했다. 운동의 권위 회복, 그것은 대의기관 존중과 다수결 원칙 정상화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형식'이 튼튼하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내용'도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운동 진영 전체의 내부 점검과 자기 혁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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