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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다이아몬드' 찰스 테일러,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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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다이아몬드' 찰스 테일러, 그는 누구인가

내전과 부패로 찢겨진 서아프리카의 비극 상징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반군에 무기를 건내고 '피묻은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를 받는 등 반인륜범죄 혐의로 국제 재판소에 기소된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테일러의 재판을 맡은 시에라리온 특별법정(SCSL)은 26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 레이드스헨담에서 연 재판에서 "테일러가 반인륜 범죄와 전쟁범죄를 방조한 데 형사법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최종 선고가 나오기까지는 한 달 이상이 소요될 예정이지만 전직 국가 정상이 국제 재판소에서 유죄를 받은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열렸던 뉘른베리크 재판 이후 최초라는 점에서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 26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 레이드스헨담에서 열린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있는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 ⓒAP=연합뉴스

<BBC>와 <가디언>은 26일 서아프리카에서 수년 간 잔학한 폭군으로 악명을 떨쳤던 테일러의 생애와 서아프리카 극빈국들의 비극을 소개했다.

테일러는 1948년 라이베리아의 한 아메리코-라이베리안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메리코-라이베리안'(Americo-Liberian)은 19세기 미국의 노예제도가 철폐된 이후 미국의 주도로 라이베리아에 정착한 흑인 집단을 일컫는 말로 엘리트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어린 시절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 약 48km 떨어진 한 시골 지역에서 자랐다. 테일러는 훗날 자신이 어린 시절 학교에 맨발로 걸어 다녔다고 회상했지만 그의 부친도 원주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특권이 있는 엘리트였다.

반면 테일러의 모친은 라이베이아 토착부족인 골라족이었는데 이러한 배경은 테일러가 훗날 라이베리아와 미국에서 동시에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자산이 됐다. 테일러는 자신의 중간 이름인 '맥아더'(McArthur)를 나중에는 골라어로 '강자'라는 뜻을 지닌 '간카이'(Ghankay)로 바꿨다.

학교를 마친 뒤 테일러는 교사가 됐고 20세에 아이를 낳았다. 이후 수도 몬로비아로 거처를 옮겨 재무부에서 회계업무를 맡았다. 1972년 그는 다른 아메리코-라이베리안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게 자신에게 출세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학을 결심한다.

메사추세츠 벤틀리대에서 테일러는 스포츠카를 몰고 트리니다드 출신 애인과 두 번째 아이 처키를 낳았다. 경제학을 전공했고 미국 내 라이베리아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해나갔다. 동시에 미국에서 고국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나갔다. 백악관 인근에서 연 한 시위에서는 당시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톨버트의 가짜 관을 끌고나오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쿠데타 정부의 관료에서 도망자 신세까지

테일러는 1980년 톨버트 정부의 초처으로 고국에 돌아가 국가 현대화사업의 자문을 맡는다. 하지만 2달 뒤 원주민 출신의 군인 사무엘 도(Doe) 상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도는 톨버트 대통령과 아메이코-라이베리아 엘리트들을 제거하고 이후 수십년 간 이어지는 내전의 서막을 알렸다.

권력을 잡은 도는 테일러를 조달청장에 앉히고 내각에도 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중용했지만 1983년 테일러가 미 뉴저지의 한 제조업자에게 과도한 돈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고 횡령 혐의로 그를 몰아붙였다. 테일러는 미국으로 도망쳤지만 1984년 보스턴에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메사추세츠의 교정시설에서 1년 이상을 보낸 테일러는 1985년 탈옥에 성공하는데, 나중에 법정에서 그는 미 정부가 자신을 풀어줬다고 주장했다. 탈옥의 배후에는 부패하고 폭력적이었던 도 정권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테일러에게 맡기려는 미 정부가 있었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피묻은 다이아몬드'와 함께 시작된 비극

이후 멕시코를 통해 서아프리카로 돌아간 테일러는 정권 전복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곁에는 아프리카의 독재자와 반군 지도자들이 함께 했다. 그는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막에 꾸려놓은 혁명가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고,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부르키나 파소의 블레즈 콩파오레와 같은 독재자들과도 함께 했다. 유엔(UN)의 경고를 무시하고 라이베리아에서 돈벌이 궁리를 하는 국내외 자본들도 테일러의 편이었다. 가장 가까운 동맹은 이웃국가 시에라리온에서 반군 혁명연합전선(RUF)을 이끌던 포다이 산코였다.

1989년 테일러와 산코가 이끄는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은 군사 공격을 개시한다. 도 정권과의 내전에서 소년병, 대량학살, 약탈과 강간 문제가 터져나왔다. 도는 1990년 NPFL에서 독립해 소수반군을 결성한 프린스 존슨에 의해 붙잡혀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1996년 내전이 공식 종료될 때까지 테일러는 라이베이라 대부분 지역을 장악해 나가면서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극했다. 아프리카의 중재국들이 라이베리아 국민을 보호하는데 집중하는 틈을 타 산코와 RUF는 시에라리온에서 행동에 나섰다.

이후 몇 년 간 RUF는 시에라리온의 금과 다이아몬드를 장악했고, 그 보석들은 테일러가 내주는 무기와 맞바뀌어 라이베리아로 흘러들어갔다. 테일러는 1996년부터 2002년 사이 RUF에 무기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피묻은 다이아몬드'를 받았다. 그는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1990년대 초반 RUF에 "소량의 무기와 탄약을 건내줬다"고 인정했지만 그 이후에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내전이 진행되던 1996년 실시된 시에라리온 선거에서 패한 산코는 타깃을 민간인에 맞췄다. 반군들은 협조를 거부하는 민간인 수천 명의 사지를 칼로 절단하며 공포를 조성했다. '무기가 없으면 선거도 없다'(No arms, no elections)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비슷한 시기인 1997년 테일러는 75% 이상을 득표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선거 감시단은 당시 상당히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고 판단했다. 현재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자 작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렌 존슨 설리프는 당시 테일러와의 대결에서 전체 표의 10%밖에 얻지 못했다.

잔인한 군사지도자 테일러의 압도적인 승리는 국제사회를 혼란에 빠트렸다. '아버지'(papay)라는 별명을 가진 테일러는 국내에서 가정적인 남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유권자들은 그의 군사력을 내전으로 찢겨진 나라를 안정시키기려는 도구로 받아들였다. 당시 테일러의 유세장에서는 "그는 내 엄마를 죽였어. 그는 내 아빠를 죽였어. 나는 그에게 투표할거야"라는 구호가 흘러나왔다. 내전으로 민간인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테일러가 라이베리아의 부패와 폭력을 끝냈다는 주장이었다.

▲ 1999년 사에라리온 내전 당시 쵤영된 내전의 참상. ⓒAP=연합뉴스

테일러 시대의 내리막길

하지만 집권 초부터 테일러 개인 친위대에 의한 살인과 실종이 빈발하자 라이베리아 국민들의 지지는 급격히 사라져갔다. 그의 아들 처키는 당시 테러 진압 조직을 지휘했는데, 그는 2009년 플로리다 법정에서 미국인이 해외에서 고문을 자행한 혐의로 97년형을 선고받았다.

테일러의 악명이 높아지면서 미국도 행동에 나섰다. 시에라리온의 내전이 격화되던 1999년 클린턴 행정부는 테일러와 그 가족의 해외 이동을 제한해 무기 공급을 중단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1999년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 연합'(LURD)이 세워지면서 테일러 시대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에서 테일러의 무기 판매를 규탄했고, 2002년 테일러의 죄를 가리는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이 세워졌다. 2003년 테일러는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됐고, LURD의 몬로비아 입성이 임박하자 테일러는 그해 8월 모세스 블라 당시 부통령에게 자신의 권한을 모두 이임한 뒤 사임하고 나이지리아로 도주했다.

테일러가 법정에 서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2006년 나이지리아 정부가 그의 추방을 결정하자 테일러는 외교관 차량으로 위장한 차를 타고 다시 도주했다. 그는 결국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사이 국경 인근에서 붙잡혔다. 당시 그의 가방에는 5만 달러의 현금다발이 들어있었다.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으로 이송된 그는 2006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로 보내졌다. ICC는 헤이그 인근 레이드스헨담에서 시에라리온 특별법정 재판을 시작했다. 당시 테일러의 '절친'이었던 산코가 사망한 이후여서 홀로 남겨진 테일러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테일러는 재판에 앞서 자신이 라이베리아 정권 교체를 원하던 서방의 희생양이었으며, 실제로는 지역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하던 중재자였다고 주장했다. 2010년에는 영국의 슈퍼모델 나오미 켐벨이 테일러에게서 '피 묻은 다이아몬드'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테일러가 집권 시절 인간의 심장을 먹었다는 엽기적인 증언도 나왔다. 선고가 내려지던 26일 검은색 양복 차림으로 출석한 테일러는 재판부의 판정에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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