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매장을 지나 5층으로 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텁텁한 먼지와 본드냄새가 어우러진 5층 공장에서 노동자 93명은 매장에 진열될 등산화를 만들었고, 그 뒤로는 "생산부서를 인도네시아로 이전한다"는 공고문과 "이날 자정까지 명예퇴직을 하지 않으면 위로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안내문이 나란히 붙었다.
▲ 서울 성동구 성수동 K2코리아 건물 1층(왼쪽)과 5층(오른쪽) 풍경. 한 노동자가 신발 밑창에 본드를 바르고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2세 경영인 주주배당 100억…'고용창출 우수기업'이 정리해고?
K2코리아는 지난달 8일 "타 브랜드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장을 해외로 이전해야한다"며 "5월 31일자로 공장 폐업에 앞서 불가피하게 정리절차를 진행한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93명에게 보내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K2코리아에서 만든 신발을 '메이드인 코리아'에서 '메이드인 인도네시아'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회사의 정리해고 통보는 급작스러웠다. 10~15년 동안 K2코리아에서 신발을 만들었던 노동자들은 "회사는 흑자로 매년 승승장구하고 정리해고가 불가피할 만큼 긴박한 상황도 아닌데 갑자기 나가라니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김필성(51) 씨는 "IMF 때 어려운 시기라고 해서 보너스와 학자금도 반납하고 몸이 다 망가지도록 일했는데 사업주는 달다고 빨아먹고 쓰다고 뱉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K2코리아는 1972년 한국특수제화를 모태로 설립된 토종브랜드로, 노스페이스와 코오롱스포츠에 이어 아웃도어업체 중에 국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아웃도어 시장이 팽창하면서 이 회사의 지난 10년간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은 20배가량 늘었다. 지난해 이 회사는 매출액 4000억 원을 돌파했고, 2010년에는 당기순이익이 400억 원을 넘었다. 올해부터는 노스코리아와 함께 캠핑용품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해 매출액을 140% 늘릴 계획이다.
K2코리아 주주들은 2010년부터 2년간 총 145억 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그 중 74%는 2세 경영인인 정영훈 대표이사가, 나머지 26%는 그의 모친인 성유순 씨 등이 가져갔다. 지난 2002년 정동남 전 K2코리아 대표이사가 실족사를 당하면서 갑자기 경영을 이어받은 정영훈 대표이사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 100억 원이 넘는 상속세를 주주 배당금으로 10년에 걸쳐 분납했다가, 세금을 거의 완납한 2010년부터 2년 동안 배당금으로 106억 원을 챙겼다. 여러모로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노동자들이 특히 가장 분노하는 대목은 K2코리아가 불과 두 달 전에 "경기불황에도 사무직원 74명을 채용했다"는 이유로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에 선정돼 이명박 대통령 이름으로 표창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 대가로 이 회사는 정부에서 세무조사 유예, 정기 근로감독 3년간 면제, 각종 대출금리 우대를 받고 있다.
정영훈 K2코리아 대표는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 수상 소감으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것은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에 필수 원동력"이라며 "국내 아웃도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서 고용의 질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생산직 정리해고를 통보하기 전날인 지난달 7일 디자인 영업 마케팅 등에서 사원 모집 공고를 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74명 사무직원의 고용을 창출했다고 이명박 대통령이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상'을 준 지 불과 두 달 만에 생산직 93명을 자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 K2코리아 정영훈 대표이사는 2년 동안 주주배당금 106억 원을 받았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본드 냄새 맡아가며 일해도, 회사 키웠다는 자부심에 버텼는데…"
K2코리아 성수동 공장에서 신발을 만들어온 노동자들은 평균 근속년수가 10년 이상으로 대부분 40~50대이고, 전체 93명 중 68명에 해당하는 73%가 여성이다. 임금은 여성노동자의 경우 한 달에 97~100만 원, 남성노동자는 170~180만 원가량을 받았다. 하루에 신발 900켤레를 만드는 대가로 한 달에 신발 5~9켤레 값을 받는 셈이다.
노동자들은 "밖에서 보는 회사 이미지는 좋지만 공장 내 작업환경은 최악"이라고 입을 모은다. K2코리아에서 11년째 일해 온 김옥경(가명·55) 씨는 "여름에는 기계에서 나오는 열 때문에 공장 온도가 40도를 넘었지만, 그 흔한 에어컨 하나 없어서 각자 집에서 선풍기를 가져다 썼다"고 말했다. 김 씨는 "한 아주머니는 더위를 먹고 공장에서 쓰러지기도 했다"며 "그 이후로 여름에는 대야에 얼음을 넣어줘서 손을 담가가며 일했는데, 그마저 복날이 지나면 회사는 얼음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1.5kg짜리 신발을 하루 종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노동자들은 어깨, 목,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여성노동자들은 신발 밑창을 사포로 갈면서 나오는 먼지와 신발에 들어가는 화학약품 냄새 때문에 비염이나 갑상선질환도 흔하게 걸렸다. 김 씨는 "빼빠가루가 코와 눈으로 들어가서 기침 마를 날이 없었고, 옷에는 항상 본드가 덕지덕지 묻었지만, 관리자들은 뻑 하면 나가라고 말했다"고 털어놨다.
"관리자들은 우리를 인간 취급을 안 했어요. 아줌마들한테 차마 담지 못할 욕도 했고요. 딸 대학교 졸업식을 못 가게 해서 울면서 일한 아줌마도 있어요. 뻑 하면 나가라고 해서 아파도 휴가도 제대로 못 썼습니다. 먼지 수북한 공장 바닥에서 박스 깔고 밥을 먹을 때면 서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자부심과 "회사를 같이 성장시켰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정준호(51) 씨는 "30년째 이 계통에서만 일하다가 6년 전에 K2코리아에 정년퇴직하러 들어왔다"며 "돈을 떠나서 회사가 커간다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케이투는 원래 신발로 성장한 회사거든요. 처음 시작할 때 의류 분야는 없었어요. 그런데 돈 벌었다고 이제 와서 자기 새끼 내치는 회사가 왜 대통령상을 받는지 모르겠어요. 대통령상을 줄 거면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줘야지 왜 이명박이 줍니까? 우리가 일해서 회사가 이렇게 컸는데 왜 우리가 그 화살을 맞아서 죽어야 합니까?"
▲ 라인 유지를 요구하는 노동자들과 정영훈 k2코리아 대표이사 ⓒ프레시안(김윤나영) ⓒ연합뉴스 |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가라? 부서 이동은 죽으라는 얘기"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통보받은 지 일주일 만인 지난달 14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을 요구했다. 그러자 사측은 교섭을 거부하고 "3월30일까지 명예퇴직을 신청하면 1년 치 임금을 위로금으로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위로금도 없다"며 압박했다. 노조 관계자는 "원래 명예퇴직기한이 4월20일까지였는데, 노조를 만든 바로 직후인 15일경 갑자기 회사가 3월30일로 기한을 앞당겼다"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몇몇 언론에 K2코리아의 정리해고 사태가 보도되자 사측은 지난 23일 "예정대로 성수동 공장은 폐쇄하고 인도네시아로 생산기지를 옮기되, 남은 직원들은 부서를 재배치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정리해고를 할 만큼 회사의 경영사정이 '긴급하지 않았고' 회사가 '정리해고를 회피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지난달 29일 3차 교섭에서 사측은 부서 재배치안으로 △인도네시아 공장 △개성공단 △신발개발부 △직영점 판매직으로의 이전을 제시했다. 노동자들은 이를 두고 △가정이 있는 노동자들이 인도네시아나 개성공단에는 갈 수 없고 △신발개발부는 인원이 3~4명밖에 필요하지 않는 데다, 설사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10년 동안 신발을 만들던 사람이 신발 모양을 개발할 수는 없으며 △판매일은 20~30대 여성들이 하는 만큼 40~50대 여성이 버틸 수 없다고 반발했다.
10년차 노동자인 김선자(49) 씨는 "아가씨가 하는 일인 판매직을 이 나이에 시키는 것은 부서 배치 이후에 사직서를 쓰게 하기 위해 회사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씨는 "우리는 신발밖에 못 만드는데, 우리를 컴퓨터 앞에 앉힐 것인가, 신발 디자인을 하라고 할 것인가"라며 "부서 이동은 죽으라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우리 요구는 라인을 유지하라는 거예요. 회사는 지금 명예퇴직하면 일 년치 임금 1200만 원을 주고 명예퇴직 안 하면 그마저 안 준다고 하는데, 우린 그런 돈 필요 없어요. 그냥 지금 일자리만 달라는 거예요."
K2코리아 관계자는 "해외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새로운 공법을 적용해 생산하는 반면 국내 공정은 신공법을 적용하기 어려운 여건에 처해있다"면서도 "그럼에도 직원들(의 해고 문제) 때문에 지난 10여 년간 전체 공정 중에서 마지막 공정만 국내 공장에서 유지해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내에서 신공법을 적용하려면 새로 설비투자를 해야 하는데, 이미 해외 투자를 한 상태라서 돈을 두 배 가까이 들여 새로 설비 투자를 하기는 어려운 여건"이라며 "설사 설비를 마련한다고 할지라도 요즘은 신발을 만들려는 인력 자체가 적어서 추가 인력수급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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