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지하철 5호선 왕십리역에서 기관사 이모(43) 씨가 공황장애를 앓은 끝에 달리는 지하철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건을 두고, 도시철도공사 경영진의 강압적인 태도와 열악한 근무환경이 이 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도시철도노조는 13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서 몇 시간씩 같은 일을 하는 만큼 기관사들은 정신질환에 취약하지만, 도시철도공사 경영진은 '1인승무제'와 '병가일수-경영평가 연계 시스템' 등으로 기관사들을 열악한 업무 환경에 내몰았다"고 비판했다.
현직 기관사인 오은섭 서울도시철도노조 사무국장은 "서울메트로나 코레일에서는 2인 승무제를 시행해 지하철 운전과 나머지 일을 두 명이 분담하지만, 도시철도공사에서는 기관사 혼자서 지하철 운전, 출입문 취급, 안내 방송, 객실 문제 해결을 모두 떠맡는다"며 "밀폐되고 어두운 공간에서 혼자 일하다 보면 기관사들은 심리적인 압박을 심하게 받는다"고 주장했다.
오 사무국장은 또한 "공사가 4~5년 전부터 전기값을 아낀다고 (지하철 터널 내) 형광등을 껐다"며 "스크린도어가 도입되면서 터널은 더 밀폐되고 어두워졌는데도, 공사는 환풍 시스템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러한 환경이 기관사들을 '정신질환'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지하철 기관사의 '신경정신질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04년에는 기관사의 공황장애가 산업재해로 공식 인정됐고, 2006년 8월까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만 32명이 정신질환에 걸려 11명이 산재 승인을 받았다.
2007년 기관사 특별건강 검진 결과에 따르면, 기관사의 우울증 유병율은 일반인의 2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4배, 공황장애는 7배나 높았다.
고(故) 이모 씨 또한 공황장애를 앓아 지난해 6월 열흘간 휴가를 내고 병원치료를 받았고, 내근직으로 전직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심리적 괴로움을 호소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업무를 마친 후 일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황장애란 현실적으로 위험한 대상이 없는데도 예상치 못하게 극단적인 공포에 휩쓸려 죽음에 이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극도의 불안 증세로, 심장이 터지도록 빨리 뛰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우며 땀이 나는 신체증상을 동반한다. 증세가 심한 경우 승객들의 안전도 위협받을 수 있는 셈이다.
현재 공황장애를 비롯한 신경정신질환을 앓는 지하철 기관사의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는 상태다. 오 사무국장은 "병가 사용일수가 개인별, 팀별, 소속별 경영평가의 지표로 반영되기 때문에 현장 소장이 병가를 잘 못 쓰게 한다"며 "지금도 불안장애나 공황장애를 앓는 기관사들이 있지만, 기관사들은 자신의 병을 드러내면 퇴출될까봐 감추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노조는 또한 "공사 경영진은 산재요양 후 현장에 복귀한 기관사들에게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업무복귀프로그램을 강요하고, 사무실 잡일을 시키는 등 낙오자 취급을 했다"고 덧붙였다.
노조는 기자회견을 통해 △도시철도공사가 고인의 죽음을 산재로 인정할 것 △기관사를 포함한 도시철도노동자의 직무스트레스 조사 및 역학조사를 노사 공동으로 실시할 것 △산재요양 후 현장에 복귀한 노동자에게 강제하는 '업무복귀프로그램'을 전면 수정할 것 △1인 승무제를 폐지할 것 등을 요구했다.
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이 씨의 죽음에 대해 "작년에 병가 낼 때도 진단서에 어지럼증, 두통, (한의학상) 기음양허증이라는 병명만 나온 상태여서 공황장애를 인정할 수 없다"며 산재 인정 가능성을 부인했다.
고인이 전직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데 대해서는 "전직에도 원칙과 체계가 있다"며 "기관사가 아프다고 전직 신청을 해도 일일이 받아 줄 수 없다. 아프다고 다른 직종 가면 다른 직종에서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겠나"라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서울도시철도공사는 1995년 창립할 때부터 1인 승무를 염두에 두고 시스템을 만들었고, 지하철이 개통할 때부터 1인 승무로 쭉 운영돼 왔다"며 "인천, 광주, 대구 지하철도 전부 1인 승무제인데 이제 와서 1인 승무제를 폐지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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