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연세와 건강이 좋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설은 인상적이었다. 역시 연설의 '달인'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여의도에서 연설을 들은 후 20년 만이었다. 대부분의 연설 내용이 햇볕정책의 성공적인 시행과 그 결과에 대해 할애되었지만, 정작 연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김 전 대통령의 농담으로부터 나왔다.
"전쟁이 나면 왜 20대가 전쟁터에 나가야 하나요? 전쟁 결정은 40대 이상이 내려놓고, 막상 전쟁에 나가는 것은 20대 젊은이들이에요. 전쟁을 결정한 40대 이상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무복무 제도에 민감한 학생들 앞에서의 재치 있으면서도 뼈 있는 농담은 좌중을 휘어잡기 충분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한 마디에 그의 인생 전부가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인생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가 지칭한 '40대'는 말 그대로의 '40대'가 아니었다. 그가 언급한 그 '40대'는 지난 50여년 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했던, 그의 햇볕정책을 허물어트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이 땅의 보수세력, 또는 소위 '주류'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현대사에서 한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 많은 미움을 받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김대중은 국내외에서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사람들은 호 불호를 떠나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표를 보냈다. 동시에 그는 지역주의의 상징이었고, 정치 9단의 칭호를 받았던 3김 중의 하나였다. 1987년 대선에서 야당의 단일화 실패에 대해 실망하면서도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화 진영의 고민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박정희가 개발시대의 산물이었다면, 김대중 역시 민주화 시대의 산물이었다. 단지 그 혼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의 보수 야당,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갖고 있었던 성격과 고민이 그를 통해 나타났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상징성은 단지 상황이나 외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그의 회고록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인간 김대중의 출생에서부터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이르기까지 85년에 이르는 그의 인생역정은 한국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형 도시였던 목포에서 성장한 그의 초년 시절은 그 시기를 증오하면서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일본인 교사들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여느 지식인의 회고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천재 중 하나였던 최남선이 건너가 있었던 만주 건국대학에의 진학을 꿈꾸고 있었던 그는 만주에서 성공을 꿈꾸고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 중 하나였다.
▲ 김대중 전 대통령. ⓒ프레시안(손문상) |
상황은 1970년부터 크게 변화한다. 탁월한 정치력을 갖춘 김대중은 많은 정치인,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들 중 맨 앞에 있는 '상징'이 되며, 한국현대사를 앞에서 끌어가는 선두주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활동은 시련의 시대에 더 빛을 발하였으며, 이제 그 자체가 한국현대사가 된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 2003년 대통령직 퇴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서전의 내용은 여느 한국현대사 책보다도 더 훌륭한 자료와 내용을 갖추고 있다. 그의 자서전만으로도 한국현대사의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그냥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다.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은 김대중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가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민주화'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역정도 그를 민주화의 중심으로부터 밀어내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그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보수적인 여당과 '야합'함으로써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면, 그는 끝까지 야당으로서의 외길을 걸었다. 그만큼 그는 강한 의지를 가진 정치인이었고, 무엇이 그가 정치인으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수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한국 역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수십년 간의 개발독재가 곪아터진 시점,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하는 시기, 탈냉전 이후 남북관계의 전환점, 그리고 기회이자 위기로 다가왔던 밀레니엄의 시기에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수많은 난제들이 그와 그의 민주화운동 동지들 앞에 놓여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특별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바로 '국민의 정부'에게 적절한 말이라고 할까? 그만큼 국민들의 희망이 컸다는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한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6.15 공동선언만 하더라도 한반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의 정부 시기 결정적인 변화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감지되었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우리 생활의 일상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 역시 큰 변화를 주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의사의 처방없이는 항생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개개인의 인권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성부가 등장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만을 위한 교수직 공채가 나왔고, 국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높아졌다. 다수결의 민주주의 원칙 속에서 받는 피해가 당연시되었던 소수자들을 지키기 위한 국가인권위원회의 발족 역시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신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수년 간 논란을 일으켰던 전교조가 합법화되었다. 이제 모든 개개인들이 자기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한 조건들이 조금씩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화가 개개인의 생활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NGO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공'이 있다고 해서 '과'를 가릴 수는 없다. 그는 지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였다. 아마도 이 점이 김대중 전 대통령 개인에게도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민주화 과정에서 씻을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겼다. 1987년 단일화 실패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단일화가 실패했던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 변명을 수용한다면, 1946년 좌우합작에 성공하지 못했던 정치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변명을 들어야 할 것이다.
1987년 단일화 실패는 단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몇 년 후퇴시키는 것 이상으로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야당이나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공격과 비판은 '분열', '파벌투쟁', 그리고 '권력욕'이 그 중심에 있으며, 1987년의 경험은 그 중심적 사례가 되고 있다. 또한 1987년의 실패는 우리 사회가 해결했어야 할 문제들을 미룸으로써 그 과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컨대 과거사 문제가 정치적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문제로 해석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 역시 1987년의 단일화 실패가 가져온 중요한 부작용이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해석일까? 모든 일이 시기를 놓치면 항상 무리수를 두게 되거나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1987년 6월 항쟁 직후의 시기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였다.
그리고 대통령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진보진영의 분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87년의 '비판적 지지'를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정부 시기 정리해고를 비롯한 노동문제와 양극화의 심화는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했다. '왼쪽 방향등을 켜고 오른쪽으로 가는' 현상은 참여 정부에도 계속되었다. 어쩌면 그의 독특한 대중경제론과 시장경제론이 현재의 좌우 기준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현대적 내용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1992년의 대통령 선거를 통한 정권재창출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만으로 국민의 정부 시기 내내 있었던 사회적 비판을 덮을 수는 없다.
남북관계의 진전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고,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큰 영광을 그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안긴 것이었지만, 남남갈등을 심화시킨 측면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즉, 합리적 보수 세력을 껴안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된 남북관계의 진전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무리한 인사나 그의 아들이 관련된 비리 사건들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재세력들의 인사 전횡과 부정부패에 식상해 있었던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의 리더와 그 그룹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드러난 실상은 이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보수 언론의 공세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원인은 국민의 정부로부터 제공된 것이었다. 모든 책임을 그와 국민의 정부에게만 돌릴 수는 없지만, 10년 진보 정권에 진보세력이 등을 돌렸던 책임으로부터 국민의 정부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이러한 '과'의 문제를 그 개인만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비역사적 평가다. 수십년 동안 정보부로부터 감시와 탄압을 받아온 그에게 믿을 수 있는 '측근'은 매우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 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역정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독재의 유산은 독재의 계승자뿐만 아니라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도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경제정책이나 대미, 대일 정책에 대한 비판 역시 김대중 개인의 한계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김대중 개인이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단 이후 50년이 넘는 냉전 기간을 통해 고착된 구조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참여정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성급한 '진보'들은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고, 그 결과가 2007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오히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어진 한계 안에서 최대한도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자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서전을 통해 보여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솔직한 사람이다. 그가 한국사회와 역사에 사과를 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고 있다. 다른 자서전에서 보듯 지루하게 변명만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의 변명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낄지라도 그나마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이 정도의 사과라도 한 예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자서전 속에는 그의 인간미가 흐른다.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좀 아쉽기는 하지만.
자서전의 말미에 그는 정조를 그린 드라마 '이산'을 보았다고 했다. 마치 김대중과 노무현의 시대를 보면서 마치 영조와 정조 시대를 보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시기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던 시기였고, 평화스러운 시기였다. 영조와 정조의 시기는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 시대로 평가되고 있다. 중앙무대에는 '진보'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보수'들이 함께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을 외쳤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결코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영정조의 노력이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졌듯이 말이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우리가 너무 많은 욕심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조와 정조의 노력이 100년이 넘는 노론의 힘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듯이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개혁이 단 한 번에 분단 한국의 장벽과 구조를 넘어서는 것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너무나도 어렵운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국민들이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자서전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성과들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19세기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모두의 잘못일 것이다. 19세기 망국의 책임을 영조와 정조에게만 돌릴 수 없는 것처럼.
* 필자 박태균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 9월 이래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통일연구소 출판자료 실장(2006-2007)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방문연구원(1997-1999)과 교환교수(2007-2008)로 활동하였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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