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다시 칼국수 끓이는 두리반, 문 닫는 홍대 앞 라이브 클럽"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다시 칼국수 끓이는 두리반, 문 닫는 홍대 앞 라이브 클럽"

[2011 대중음악 결산②·끝] 사회와 호흡한 음악이 이뤄낸 결과들

- 2011 대중음악 결산
<1>한류·나가수·검열논란…다 아이돌 때문이야!
올 한해 언더그라운드 음악 신(scene)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대중음악이 투쟁현장에 크게 울렸다. 대중음악인들은 홍대 앞 두리반, 제주 강정마을에서 투쟁을 위한 연주를 했다. 대중음악 산업을 떠받치는 노동자들에 대한 조명도 반드시 필요하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다룬 조용한 영화가 조용히 개봉했다.

공연문화의 변화도 되돌아봄직 하다. 대형 페스티벌의 대형 자본 의존도는 더욱 심해졌고, 그늘에서는 자본의 공세에 견디지 못한 언더그라운드 클럽이 새로운 생존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에게 더 많은 두리반을!"

531일 간의 공방 끝에 재개발 역사에서 이례적으로 승리를 쟁취하고 끝난 두리반 투쟁 사태에 음악인들이 합류한 건 지난 2010년 2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대 인근 클럽에서 활동하던 젊은 음악가들이 '자립 음악회: 사막의 우물 두리반' 행사를 시작해 안종려, 유채림 부부와 함께 점거투쟁에 나섰다. 대중음악이 길거리로 나온, 근래 가장 적극적인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뒤이어 이들은 같은 해 5월 1일, 노동절 120주년 기념행사로 '전국자립음악가대회: 뉴타운 컬처 파티 51+'를 열었다. 홍대를 상징하는 음악인부터 설 클럽을 찾아 헤매던 젊은 음악인에 이르기까지 61개 팀이 참여한 이 공연은 한국 안의 다른 한국, 대중음악 안의 다른 음악을 상징했다. 이 공연을 통해 단편선, 하헌진, 밤섬해적단 등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이들은 무려 <GQ> 등의 잡지와 인터뷰하기도 했다).

두리반 투쟁의 경험은 명동 철거구역 마리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곳에도 젊은 음악인들과 청년들이 들어섰다. 음악이 실존을 고민하는 청년 세대, 생존의 위협을 받는 철거민과 본격적으로 연대한 것이다.

음악인들의 두리반 투쟁은 다양한 함의를 낳았다. 실업과 비정규직화에 고통 받던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두리반 투쟁을 통해 증폭됐다. 소외된 비주류의 목소리가 노래로 울림을 낳았다. 무엇보다, 민주화 투쟁 이후 세대가 대자본에 맞서 뭉쳐 싸워 '이긴' 경험을 얻었다. 이 자리에 노래가 있었다.

무엇보다 두리반 투쟁을 경험한 음악인들이 새로운 시도에 나선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기존 인디 문화에서 대안을 찾던 몇몇 이들과 음악인들이 타협해 문래동에 새로운 클럽 로라이즈를 열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하에는 클럽 대공분실을 열었다. 새로운 신(scene)을 일구려는 노력, 나아가 새로운 음악생산 방식을 만들려는 실험이 이 모임의 주체이자 두리반 투쟁의 결과물인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통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리반의 승리와 새로운 신 탐색, 음악인들의 자급 노력이 모두 올해 일어났다.

지난 6월 26일, 두리반에서는 마지막 공연 '우리에게 더 많은 두리반을'이 열렸다. 이후 두리반이 머물던 동교동 빌딩은 사라졌고, 두리반은 서교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다시 칼국수가 끓어오른다. 올해 가장 극적으로 음악의 힘을 보여준 사건은 철거지역에서 나왔다.

▲올해 두리반에서 열린 '뉴타운컬처파티 51+'에서 아스트로 노이즈의 공연 모습. ⓒ김지양

음악생산자는 누구인가

음악산업의 주요 축에는 기획사, 유통사가 있으며, 무엇보다 스타가 자리하고 있다. 더 근원으로 올라가면 어떨까. 악기 제작자가 곧 음악산업이었다. 작곡법이 알려진 후에야 음악산업은 출판과 결합했고, 레코딩 기술 발전 후에야 재생산업이 됐다. 음악가를 뒷받침해주는 악기 제작자는 음악산업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다. 이 사실은 흔히 간과되곤 했다.

이를 새삼 일깨운 일은 노동자 투쟁이었다. 무려 18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싸워왔다. 이들을 위해 음악인들이 뭉친지도 3년이 지났다. 지난 2009년 노동자 해고가 불법이라는 판결이 나왔으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들을 후원하는 음악인들의 '수요문화제'도 (아직은)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한국의 길거리를 넘어 독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부당해고의 부도덕성을 알리러 나섰다.

그리고 이 지난한 과정을 담담히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올해 개봉했다. <기타이야기>로 56명 노동자의 부당해고 사태를 알린 김성균 감독은 현장의 기록을 담은 두 번째 영화 <꿈의 공장>을 통해 악기제작자와 멀어진 음악인의 오늘을 이야기하고, 화려한 음악 뒤켠에 숨겨졌던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담담히 읊었으며, 지구적 자본화로 재편된 음악생산 공정을 고발한다.

90년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날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톰 모렐로, 60~70년대 디트로이트 록의 기수였던 MC5의 기타리스트 웨인 크라머가 등장해 노동자들을 지지한다. 키스의 진 시몬스는 이들을 비난한다. 삶의 문제와 당위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국의 기타리스트들 사이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싸늘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교차한다.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나'라는 질문은 1960년대 플라워 무브먼트 이후 잊을만하면 나온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꿈의 공장>은 끓는 피를 가졌던 예술 소비자들에게 현실을 알렸고, 영원히 풀리지 않을 불편한 질문을 다시금 내던졌다. 적어도 대중음악계에는,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가 올해 개봉했다.

▲영화 <꿈의 공장>의 한 장면. ⓒ시네마달 제공

공연장을 포위한 자본

국내 대형 록 페스티벌이 대기업 자본에 의존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유독 올해 논란이 된 이유는 그 자본의 규모에 걸맞은 공연을 기대한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점 때문이다.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라인업과 지나친 홍보성 진행으로 빈축을 샀고,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아이돌들을 대거 내세움으로써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두 페스티벌은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대형 공연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 관객수는 지난해보다 16%가 늘어나 연인원 10만 명을 목전에 뒀고,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도 역대 최다 관객(연인원 5만4000명)을 동원했다. 라인업이 부실했다는 평가가 많았음에도 대중의 발걸음이 늘어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자본이 두 대형 페스티벌에 쏠린 반면, 국내 공연문화의 주춧돌이 돼야 할 라이브 클럽이 매말라 가고 있다는 점도 올해 확인 가능했다. 지난 5월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상징적 클럽이었던 '쌤(ssam)'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살롱 바다비는 극심한 운영난에 점주의 건강문제까지 겹쳤다. 대부분 라이브클럽이 이제 댄스클럽에 밀려났고, 높아진 임대료로 인해 홍대 신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지경이다.

결국 이는 근본이 취약한 한국 대중음악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이돌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음악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인 '한국대중음악상'을 두고 대중이 여전히 '홍대 음악상'이라고 빈정대는 까닭은, 일부 대자본 음악을 제외하면 대중음악이 설 기반 자체가 부실함을 상징한다. 대중이 음악을 소비하지 않는 한 대중음악의 기반은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씁쓸한 현실이 사라지는 공연장을 통해 드러난 한해였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