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서울 마포 사회보험노조 대회의실에서는 '한미 FTA, 의료민영화의 또 다른 이름' 토론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익히 주장해 온 바와 같이 한미 FTA가 의료·제약 산업에 대한 국가 규제를 무력화시켜 건강·복지분야를 약화시키고, 이는 궁극적으로 약값 상승과 건강보험 무력화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송기호 변호사, 신형근 건강 사회를 위한 약사회 정책실장, 이상윤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원, 장호종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송상호 사회보험노동조합 정책실장이 참석했다.
발제를 맡은 우석균 실장의 주장을 중심으로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고 토론회에서 언급된 해외의 실제 사례를 제시했다.
▲담배 제조회사도 규제에 따른 이익침해를 이유로 정부를 중재제판소에 끌고 갈 수 있다. 한미 FTA 발효 시 금연정책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뉴시스 |
금연 정책 집행 어려워져
한국은 수입 담배에 관세 40%를 부과하고 있으며, 국내 담배와 마찬가지로 광고와 판매를 제한하고 경고 문구를 표시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 FTA 발효 시 15년에 걸쳐 관세를 점진적으로 철폐한다. 또 현재 시행 중인 정책 외 추가 금연 정책 도입이 어려워진다. 이는 한국 정부가 2005년 비준한 세계보건기구(WHO) 담배규제기본협약(FCTC)과 충돌하게 된다.
실제 캐나다 정부는 로고나 트레이드마크를 달지 않고 표준화된 포장으로 담배가 판매되도록하는 단순포장 법안을 냈으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따른 제소 위협을 받았다. 지난해 필립모리스는 담배 포장지 앞뒷면의 80%를 건강 경고로 커버하는 등의 담배 규제 정책을 편 우루과이 정부를 제소했다.
약값 35% 오를 것
한미 FTA 반대론자들이 강조하는 대표적 독소조항인 의약품 허가-특허 도입 제도는 약값을 인상시킨다. 이는 의약품에 한해 특허권자가 자신의 특허권을 주장할 경우 자동으로 특허 기간을 연장해주는 제도다. 미국에만 존재한 제도로, 미국과 FTA를 체결한 나라들에 도입됐다. 특허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신약제조회사의 가격결정력이 강해져, 이로 인한 약값 상승이 이어지는 셈이다.
그나마 지난 2007년 미국의 신통상정책(New Trade Policy for America)에서 독소조항으로 규정됨에 따라, 미국과 FTA를 맺은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 등은 이 조항을 삭제했다.
약가 결정 과정에 다국적 제약회사의 개입이 허용됨에 따라 의약정책의 공공성이 약화될 것 또한 뻔하다. 정부는 (제약회사의) 원심 번복권한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 별도의 독립적 기구는 정부의 약값결정이나 보험적용 결정과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같은 기구 설립 절차는 한미 FTA가 가장 강력한 수준이다. 미·오스트레일리아 FTA는 "독립적 검토절차를 둔다"고만 규정했으나, 한미 FTA는 독립적 이의제기를 위한 '별도의 기구(independent review body)' 설립을 규정하고, 이 기구를 정부와 별도로 둘 것을 상세히 규정해 두었다.
실제 '다국적 제약회사의 무덤'이라고 불렸던 오스트레일리아는 FTA 체결 이후 공공약품정책(PBS)이 붕괴되다시피 했다. 비용대비 효과를 따져 책정하던 약가 제도가 신약 약가 책정 시에는 적용되지 않도록 FTA가 규정했고, 이로 인해 특허약품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제약산업 기반을 위축시켰다.
한미 FTA 발효 시 정부는 국내 제약산업이 입을 피해추산액을 향후 10년간 1조 원 정도로 예상하고 있으나 이는 지나치게 축소됐다. 특허소송기간을 9개월로 잡았고 특허소송 분쟁증가율도 국내제약사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만을 근거로 잡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부는 허가-특허 연계제도에 따른 피해규모만 추산했다. 그러나 실제 약가 적정화 방안의 무력화로 인한 약값상승까지 감안하면 피해는 더 커진다. 정부 정책목표인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 약가비중 기준으로 자체 계산 시, 한미 FTA에 따라 약값은 발효 전보다 35% 정도 인상할 것으로 보인다.
의료기기에도 적용
그간 미국이 맺은 FTA가 건강분야에 대한 규제완화를 의약품 등에만 규정한 반면, 한미 FTA는 최초로 의료기기까지 자유화 범주에 포함시켰다. 한·유럽연합(EU) FTA에서 의료기기가 협정 대상에 포함된 까닭 역시 한미 FTA 때문이다.
의료기기에 대한 정부 규제 완화는 의료비 상승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속적으로 의료기기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실례로, 난청수술에 쓰이는 인공와우관은 20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제품이다.
최근 국내에서 각광받는 다빈치 로봇시술기기 등 첨단 의료기기가 한국에서 매우 빨리 도입됨을 감안하면, 의료기기 도입에 대한 규제 완화는 의료비 부담을 크게 늘릴 것이다.
영리병원 도입 못 막아
▲지난 4월 1일 오후 제주특별자치도청 정문에서 보건의료노조, 민주노총제주본부, 영리병원저지제주대책위가 '우근민 도정 규탄 및 제주영리병원 철회 촉구 결의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뉴시스 |
정부는 한미 FTA에서 한국의 보건의료제도는 예외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영리병원 규제가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에 비해 의료비 상승 요인이 크며, 필수적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결국 의료비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정부가 충북·강원 등 3곳에 경제자유구역을 추가 지정하려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전국에 영리병원이 들어서는 셈이다.
건강보험제도 무력화
건강보험제도는 분명히 투자자-국가제소제(ISD) 대상이 된다. 정부가 보건의료제도는 예외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건강보험제도가 보건의료제도에 속하는지 다른 협정문에 속하는 지는 한국 정부가 규정하는 게 아니라 국제중재재판이 결정하는 사안이다.
실제 지난 2009년 미국의 영리병원 기업 센추리온(Centurion Health)은 캐나다 정부가 기업이익을 침해했다고 ISD를 통해 캐나다 정부를 국제중재재판에 제소한 바 있다.
캐나다 연방법은 캐나다 정부가 국민들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과 무상 건강보험서비스를 시행토록 규정해뒀는데, 이에 따라 캐나다 정부가 정당한 기업이익을 침해했다고 센추리온은 주장했다. 결국 캐나다 연방법과 동일한 내용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도 ISD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한미 FTA로 인해 민간보험 규제가 어려워지고 건강보험이 무력화된다는 게 문제다. 한국 정부는 공공적 사회서비스는 포괄적 예외라고 강조하지만 아니다. 사회보장서비스, 건강보험은 미래유보조항에 포함돼 있는 게 사실이지만, 최소기준대우와 수용·보상에 대해서는 유보조항에 포함되지 않았다.
실제 캐나다 뉴브런즈윅 의회는 2004년 4월, 보험료 인하를 위해 공적자동차 보험 도입을 주정부에 권유한 바 있다. 그러나 보험기업들의 ISD 제소 위협으로 이 제도 도입을 자체 철회했다. 공공보험의 보장성 강화가 약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민영보험 시장이 더 팽창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각종 분쟁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민영보험의 덩치가 커지면 그만큼 공공보험의 보장성은 더 위협받는다.
유해물질 규제 어려워져
1996년 9월 미국 에틸(Ethyl)사는 연료첨가제인 망간함유 휘발유첨가제(MMT) 수입을 금지한 캐나다 정부를 NAFTA 중재기구에 제소했다. 이 중재에서 캐나다 정부가 패소해, 캐나다 정부는 MMT를 금지하지 못하게 됐다. 이로 인해 캐나다 정부는 MMT가 인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음에도 에틸사에 1900만 달러를 배상했다.
유해물질의 인체위험에 대한 규제의 경우, 규제당국이 이 위험도를 입증해야 하나 인체실험을 하기 쉽지 않으므로 매우 어렵다. 이에 따라 국민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지도 모를 유해물질을 규제하기 어려워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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