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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입양인의 프랑스 정계 진출, 이게 '자력 성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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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입양인의 프랑스 정계 진출, 이게 '자력 성공'이라고?"

[기고] "국제입양에 대한 한국 사회의 숱한 오해들"

한국인들이 국제입양에 관해 생각하는 오해는 수두룩하다. 첫째, 1980년대 이후 국제입양 이 급감해서 일부 장애아들을 제외하면 국제입양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둘째, 국제입양으로 한국을 떠난 대부분의 "아이들"이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부심하며, 한국과 자신의 친가족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 입양아'들은 입양아들 중에서 가장 명석해서 전 세계 곳곳에서 유능한 재원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줄곧 함께해온 입양은 20세기 초·중반부터 전쟁고아들의 입양으로 본격화되었다. 이 가운데는 완전히 입양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와중에 극도로 불안한 사회와 궁핍을 피해 일시적으로 아동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아동들을 전쟁 종결 후 본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세계 최대의 국제입양 송출국 한국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아동들이 자신들의 선택과 상관없이 국경을 넘었다. 입양전문가들은 20세기 이후 최소 450,000명 이상의 국제입양이 이루어졌다고 집계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국제입양 통계에 잡힌 한국아동들의 수만 헤아려도 최소 150,000명이 족히 넘는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 입양인 수가 무려 200,000명을 넘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적게 봐서도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 중 최소 1/3 이상이 한국 출신이다. 한국의 경우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국제입양을 보낸 국가들 중의 으뜸이다. 한국과 대동소이하게 국제입양을 선호하는 나라들에서는 국제입양의 '부침'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한국은 시종일관 다수의 아동들을 전 세계로 입양 보내왔다. 한국이 부국들의 모임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며 한껏 부유해졌다고 자위하는 와중에서도, 해외입양 수는 크게 줄어든 적이 없었다.

이렇다 보니 국제입양을 다루는 문헌들에서 한국인 입양인들이 누락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여러 선진국들에서 국제입양이 후끈 달아있을 때마다 한국에서 입양을 보내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한국아동들이 언제 어떤 나라로 몇 명이나 입양이 되었는지 통계만 살펴봐도, 해당 국가의 국제입양 역사를 어느 정도 꿰뚫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한다.

국제입양, 인도주의의 실천일 뿐인가?

선진국에서도 입양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혼모에 대한 편견을 크게 줄이고 모성가구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아동들을 입양시키려는 경우가 대폭 감소했다. 이와 더불어, 68혁명 이후 인종주의 타파와 제3세계와의 연대, 그리고 남아선호사상이 또렷한 국가들에서 버려지는 여아 입양을 주창한 페미니스트 등의 노력에 힘입어 국제입양은 빠르게 증가했다. 유색인종 아이들(특히 여아들)을 입양시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라는 관념이 퍼져서 국제입양은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행위로 비쳐졌다.

그러나 일부 입양인들은, 몇몇 국가 출신들의 아동들이 유독 선호 받는 현상 속에서, 최대한 어리고 비장애인이며 좀 더 '하얀' 아이들이 환영받는 이유를 들면서, 국제입양이 순수한 목적으로만 행해지는지 캐묻기도 한다. 급진적인 입양인들은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유색인종들을 입양하는 메커니즘은 신식민주의적인 제국주의의 잔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미혼모가 낳은 아이들을 국제입양으로 쉽사리 해결하려는 작태가, 입양을 보내는 국가들의 낙후된 사회복지를 고착시키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 들끓고 있다.

한국은 해방 이후 아직까지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호주로 아이들을 숱하게 보내왔다. 심지어 국제입양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영국이나 뉴질랜드까지 한국 입양인들이 있을 정도이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여전히 "입양아"라고 부르지만, 입양의 역사가 긴 만큼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여러 입양인들이 짊어진 트라우마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입양전문학자이면서 한국 입양인이기도 한 토비아스 휘비네트(Tobias Hübinette)가 정치하게 분석한 대로,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의 미디어에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이들은 몇몇 제한된 이미지로 재현되는데, 입양된 후 심술궂은 양부모에게 학대당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인종주의에 노출된 약자로 그려진다. 입양인들은 불행한 삶을 고독하게 살면서 한을 품게 되고, 궁극적으로 자신이 잃었던 한국과의 인연을 다시금 이으며 재생의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입양인들이 전 세계에서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도, 입양인들을 이율배반적으로 바라보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입양인들은 한국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되'찾을 때 비로소 구원되기에 한국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수많은 입양인들의 송출국에 대한 태도는 '부인'

필자는 그동안 여러 입양인들을 만나면서 크게 세 가지 유형을 접할 수 있었다. 첫째는, 한국이나 자신의 입양아로서의 정체성에 관해서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현지에서 성공적이고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 집중하는 유형이다. 한국인들의 기대와 달리 입양인들 중 상당수는 이 유형에 속한다. 둘째로는, 한국인으로서 강한 정체성을 품으며 한국을 자주 방문해서 친가족과 관계를 틀거나,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이름을 쓰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입양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셋째는, 위의 유형 어디에도 알맞게 속하지 않으면서도, 한국과 부분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한국을 한 두 차례 방문해서 친부모를 찾으려는 시도를 펼치기도 하고, 다른 입양인들과 네트워킹을 맺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인으로서 또렷한 정체성을 품었거나 한국에 대해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지녔다고 보기는 힘들다.

입양인들이 겪어야 하는 일상적 인종주의

입양인들은 위의 유형 중에서 어디에 속할지언정 현지에서 소수자 지위를 거부하기 쉽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다른 나라에서,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외모와 인종을 지닌 부모와 이웃 곁에서 살아가는 것은 비입양인들에 비해 쉽지 않다. 입양인들 중에서는 또 다시 버려질까 봐 두려워서, 과도하게 양부모의 비위를 맞추며 자라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인종주의가 훨씬 교묘해진 형태로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국 입양인들은 백인들과 외모가 두드러지게 다르기에, 어릴 때부터 괴롭힘을 당할 확률이 다수인종 아동들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인종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지니기 어려운 상태에서 인종주의에 쉽사리 노출되다보니, 입양인들의 정서와 자아확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버려졌다는 사실(특히 유기 과정에서 흉터를 입거나, 장애를 갖게 된 입양인들의 경우는 트라우마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인종이 다른 가족과 살아야 하는 현실, 일상에서 쉴 새 없이 발견되는 인종주의로 인해 입양인들의 자살률은 비입양인들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입양인들은 한국에서나 입양된 국가에서나 그들을 향한 편견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에서 행해지는 입양인과 관련된 대부분의 연구는, 입양인들이 청소년(녀)으로 자랄 때까지 집중된다. 입양인들의 발육상태와 건강, 자살률, 지능지수를 비롯한 학교성적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최근 토비아스 휘비네트 등이 성인 입양인들의 삶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입양인들이 자살, 우울증, 정신병원 및 수감시설 수용, 저임금 비정규직 취업, 복지제도 의존, 비만(입양 전 극심한 영양실조와 상관관계 있음) 등 부정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대개의 입양 부모들은 백인 중상류층으로서 대학교육 이상을 받은 엘리트들이다. 여러 조사에서는 수많은 입양인들이 양부모들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처해 있다는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입양인 운동가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입양인들 중 일부는 자신을 '입양인 운동가'라고 명명한 뒤 국제입양 중단과, 입양인들이 직면한 문제해결을 위해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 중 으뜸은, 자신들을 향한 한국인들의 동정심이나 막연한 부채감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이 끈질기게 주창하는 대로 "더 이상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면, 숱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고 밝혀진 국제입양을 하루 빨리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인들 중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쓸쓸하게 지낼 바에야 선진국에서 양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이 더욱 낫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적잖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물질적인 부는 향유할지언정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출생했던 문화와 언어, 같은 인종 곁에서 자연스럽게 정체성을 확립하며 커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입양인들처럼 자신의 출생환경과 완전히 단절된 채, 새로운 환경에서 직면하는 충격과 혼란은 쉽게 보상받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혁파는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힘들기에, 비혼 엄마들에게 사회적인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 국제입양을 구조적으로 막을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덴마크 입양인 한분영 씨는 미혼모에 대한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길이, 국제입양을 궁극적으로 줄이는 으뜸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국제입양,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어야

둘째는,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하루 빨리 국제입양 사실을 기술해야 한다고 힘을 모아서 강조한다. 최소 150,000명 이상의 한국의 아동들이 전 세계로 입양된 디아스포라를 후세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일본과의 역사교과서 논쟁에 후끈 달아있는 이면에, 국제입양에 관해서는 완전한 침묵과 무관심을 보이는 것이 여러 입양인들에게 쓰디쓴 배반감으로 와 닿고 있다. 입양인들은 선진국 진입 프로젝트에 후끈 달아있는 한국에서, 국제입양이 은폐되어야 하는 타부가 되는 게 아닌지 의혹을 품고 있다.

왜곡된 국제입양 시각 제고해야

셋째는, 미디어에서부터 입양인들에 관한 구태의연한 관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 입양인에 관해 갖는 관점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 가운데서 이른바 성공한 입양인들의 '신화'를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 부풀리는 담론도 포함된다. 그동안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해외에서 유명인사가 된 여러 입양인들의 소식을 전하며, 마치 그들이 한국인으로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것처럼 치부해왔다. 반면, 입양된 후 심각한 문제에 처절하게 직면해 있는 수많은 입양인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무지를 유지하며 책임을 회피해왔다.

얼마 전 여러 언론에서는 한국 출신 입양인으로서 프랑스 정계에 진출한 장 뱅상 플라세(Jean-Vincent Placé) 씨의 소식을 우후죽순 전했다. 그가 프랑스 진보계열 정당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이자, 이번 프랑스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이른바 보수언론들에서 호재처럼 보도하는 진풍경은 웃지 못 할 코미디 같았다. 이 문제는 차치하고서, 한 보수언론에서는 "그가 입양아로 땅설고 낯설고 물설은 저 머나먼 프랑스에 천애고아로 홀로 떠맡겨져서 그 혼자 자력으로 일구어 낸 그 외로움 때문"이라고 끼적거리기도 했다. 그의 양부모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양된 장 뱅상 플라세 씨의 현지적응과 언어구사력 향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만일 그의 양부모가 "프랑스에서 자력으로 컸다"는 한국의 언론기사를 접한다면 어떠한 심정이 들까. 또한, 이미 프랑스 인으로서 살아가는 장 뱅상 플라세의 정체성을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한국인으로 설정하는 것도 문제적이다. 그는 어린 시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파양)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사춘기 시절 본인의 한국인 정체성을 부정해서 부모의 바람과 달리 한국 방문이나 한국 성(姓)을 이름에 넣는 것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가 단지 한국에서 태어나서 입양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해서 한국인으로 속단하는 태도는 합당한가.

입양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여기는지는 존중되어야 한다. 입양된 국가의 시민으로 생각하는지, 한국계 유럽인/미국인으로 사고하는지, 아니면 한국인으로 인식하는지는 전적으로 입양인의 자유이다. 우리 마음대로 입양인들의 정체성을 속단한 뒤, 부지불식간에 입양인들에게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도록 강요하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섣불리 입양인들을 한국인으로 기정사실화해서 접근하는 태도는, 적잖은 입양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상처를 가중시킨다. 게다가, 한국인들 중에는 입양인들에 대한 선입견이 강해서 불안하고 취약한 약자로 생각한 나머지 '악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입양인들은 스스로 고민하고 싸우며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주체들이다. 누군가의 도움에 수동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아이들이 더 이상 아니다.

노르웨이 시민 + 한국 입양인 + 중국인 외모

1980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뒤 1982년에 노르웨이로 입양된 브륀율프 정 첸(Brynjulf ​​Jung Tjønn)은 오늘날 노르웨이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작가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최근 <중국 남자>(Kinamann)라는 자전적 소설로 현지에서 호평을 얻고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송느오피요르다나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입양인으로서 살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어느새 아버지가 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려 한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명시적인 인종주의나 양부모의 학대를 당한 적이 없다고 토로한다. 다만, 170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데다 "째진 눈"을 지닌 외모로 인해 백인이 되는 것을 끝없이 동경해왔다고 넌지시 고백한다. 노르웨이 안팎에서 그를 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중국 출신의 유학생이나 이주노동자로 인식할 때 내뱉는 말이 '중국 남자'이다. 작품의 제목인 '중국 남자'는 한국인 입양인으로서, 노르웨이 시민으로 살아가는 젊은 작가가, 중국인으로 대우 받는 특이한 정체성을 담담하게 전하는 수작이다.

그는 자신을 '99% 노르웨이 인'이라고 여기면서도, 한국전을 볼 때마다 한국을 힘주어 응원하고 노르웨이에서 한국에 대한 위상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흐뭇해한다. 또한, 노르웨이 인들이 마시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특정 유제품을 마실 때마다 배탈이 나서 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때, 자신이 한국 출신이어서 특정 면역성분을 가지지 못한 나머지 배가 아팠다는 진단을 들으며, 자신이 결코 100% 노르웨이 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를 더듬는다. 아주 기본적인 정보밖에 없는 출생카드에서 실마리를 찾지 못한 그는, 아름다운 동양여성이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꿈을 꾼다. 그는 자신이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불행의 결과로 태어난 원하지 않는 아이가 아닌지 의심하며 살다가 만성적인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금명간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인들과 만나고 싶다는 고운 바람을 품고 있다.

결코 오기 쉽지 않은 입양인들의 한국행

필자가 만난 덴마크 입양인은 난생 처음 용기를 내서 한국을 방문하려 할 때 천안함 사건이 터져서 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어린 아이들을 대동할 생각이었던 그는 한국에서 전쟁이 터질 지도 모른다는 현지 외교부의 주의와 주변사람들의 충고를 받으며, 결국 오래도록 꿈꾸어왔던 한국방문을 무기한 연기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내가 고아원에서 버려진 뒤 생긴 것 같은 두툼한 얼굴의 흉터, 덴마크 부모님은 한국에서 올 때부터 있었다고 말하였다. 지금도 가끔씩 종잡을 수 없는 통증을 몰고 오는 이 상처는 왜 생겼을까. 바다에 게걸들린 식구들과 달리, 왜 나는 물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는지, 한국에 가면 그 실마리가 조금이라도 풀릴까. 하지만 버려진 땅에 30년 만에 돌아간 뒤 폭격에 맞아서 죽는다면, 또 그 총알이 내 아이들을 다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한국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썼다. 그는 미국에 입양된 필리핀계 여성 제르파 예이츠 룬스만(Gerfa Yeatts Lunsmann)이 고향을 방문했다가 반군에게 납치된 뒤 인질로 잡혀 있다 풀려난 사건을 목도하면서 매우 가슴이 아팠다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이어지는 디아스포라

무려 150,000명 이상이 세계 각지로 흩어진 한국의 국제입양은 어느 역사교과서에서도 부재한 은폐된 디아스포라로 뒤덮여 있다. 아이들을 너무 많이 낳아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한창일 때가 고릿적 이야기로 느껴질 만큼, 한국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덜 낳는 나라로 변모해 있다. 하지만 자력으로 아이를 기를 수 없는 나머지, 불후한 아이들을 누구일지도 모를 외국인에게 맡기는 형국은 중단되지 않은 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열악한 아동복지의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익숙하게 행해진 국제입양은 수많은 입양인들이 성인으로 자라면서 예기치 않은 여러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그들 스스로 풀라고 하는 태도는 정당한가.

이들은 힘을 주어 묻는다. 한국정부가 진정 해외입양을 근절시킬 의지와 노력을 지니고 있는지? 저출산 대책을 끊임없이 발표하면서도 국제입양을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는 모순, 입양인이 성공한 뒤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수산 브링크'처럼 한국인이 상상하는 불행한 고아의 전형으로 나와야만 비로소 한국인들에게 보이기 시작하는 작태, 이제 어엿한 '부국(?)'이 된 한국의 자존심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교과서에 등장하지 못하는 숨겨진 타자,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을 존중받지 못한 채 다수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입양인들을 향한 국민국가 강요는 여전히 입양인들에게 억압과 배제, 그리고 위선으로 와 닿고 있다.

'저출산 부국'에서 보내는 버려진 아이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국제입양은 지금도 다수의 아동들이 세계 곳곳에 입양되는 형태로 답습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인들의 바람과 달리 입양인들 중 상당수는 출생국을 방문해서 강력한 끈을 이으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는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 최근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는 성인 입양인 대상 조사에서는, 인종이 다른 양부모에게 입양된 사람들의 자살과 우울증, 일상적인 인종주의 노출, 학창시절 괴롭힘, 빈곤계층 전락은 비입양인들에 비해 우려할 만큼 높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실질적 국제입양 대책이 필요하다

▲ 한 입양기관에서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영아들. ⓒ연합
이러한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지 시스템이 괄목상대하게 개선되어야 한다.

아이를 제대로 기를 형편도 안 되면서 덜컥 아이를 낳았다고 미혼모들을 비난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는 비혼모들이 아이를 기르고 싶을 경우 국가의 개입과 지원으로 거뜬하게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네들이 기를 아이들은 장차 노동시장을 짊어질 소중한 존재들이다. 모성가구를 위해 쓰는 돈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두 번째는, 한국에서 뿌리 깊게 온존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없애야 한다.

이성애자 남녀들이 결혼제도를 통해 낳은 혈육만 정상적인 가족으로 인정하는 시각은 지양되어야 한다. 다양하게 구성된 집단에서 가구를 만든 후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이 편견 을 받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사회가 지지를 보내야 한다. 특히 매스미디어가 선도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이른바 사회지도층부터 입양이나 다양한 가구에 대한 지지입장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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