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시에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지역에 공공병원을 짓자는 내용의 주민발의 조례안이 제정됐었다. 이 조례안은 지난 7월 19일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들에 의해 폐기됐다. 대신 한나라당 시의원들은 '대학병원 위탁 운영'을 명시한 '성남시의료원설립운영조례안'을 다시 발의했다.
오영선 성남시립병원설립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은 "지역시민을 더 낮은 자세로 섬겨야 하는 정치인이 지역시민의 뜻을 쉽게 뒤집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도 "지역의료공백을 메우고, 시민들의 손으로 공공병원을 설립하겠다는 염원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조례를 하루아침에 폐지해버린 것은 주민자치를 무시하는 다수당의 횡포"라고 주장했다.
▲ 성남시립병원설립운동본부는 지난 7월 21일 성남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민 발의 조례 폐지안을 가결한 성남시의회의 사망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 경기지역본부 |
폐지 줍는 노인 "우리가 돈 걷어서라도 공공병원 생겼으면…"
'시립병원 건립'은 3222억 원짜리 초호화 청사로 유명해진 이대엽 전 성남시장의 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종합병원인 인하병원과 성남병원이 폐업하면서 성남시 수정구‧중원구에 의료 공백이 생겼다. 성남시의 62개 시민사회단체는 "폐업 반대보다 시립병원 건립 싸움으로 옮겨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요구는 간단했다. 시장은 공약을 지키라는 것.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김용진 성남시립병원설립운동본부 대표는 그 이유를 "성남시에는 의료 취약계층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분당구 쪽이야 여유 있는 분들이 계시지만, 지금도 고지대 지하나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독거노인이나 부모가 없는 사람, 취약계층 아동들이 많아요. 한 집에 많게는 6~7가구가 살기도 하고요."
그는 "시립병원을 짓자고 집회할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시에서 돈을 안 주면 우리가 걷어서라도 만들자고 했는데, 그 분이 폐지 줍는 분이셨다"며 "그만큼 공공병원이 필요하단 얘기"라고 말했다. 공공 종합병원을 짓자는 주장은 같이 활동하던 성남시민이 '의료 공백'으로 사망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할머니는 인하병원에 입원하고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몰았어요. 인하병원이 없어지면서 할아버지는 6개월 동안 할머니에게 모포를 씌워 (서명 운동에) 따라다녔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죠. 그것도 응급 상황에서 병원에 후송되던 중에 그랬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2~3개월 뒤에 어르신도 따라 돌아가시더군요."
김 대표는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성남 구시가지 주민들이 믿고 안심하고 갈 수 있는 병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민간의료기관의 과잉진료를 견제할 수 있는 곳은 공공의료기관"이라며 "성남에 공공병원이 생기면 주변 종합병원의 의료비도 낮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지역의 보건의료문제가 상당히 많은데, 정부에 이를 해결할 도구가 있어야 한다"며 "정부가 공공의료기관을 통해 지역의 장애인과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의료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공공병원 비율은 10%로 OECD 국가 중 최하 수준이다. 민간의료가 가장 활성화됐다는 미국에서조차도 전체 병원의 30%는 공공병원이다. 대다수 유럽 국가에서 이 비중은 80~100%까지 올라간다.
"공공병원은 적자라 안 된다?…공공병원이 의료비 싼 건 당연"
그러나 시의원들은 공공병원을 만들자는 주민의 요구를 번번이 묵살했다. 2003년 2만 성남시민들이 직접 만든 '성남시립병원 조례안'은 시의회가 안건을 상정조차 하지 않아 폐기됐다. 2005년 1만8845명이 다시 뜻을 모아 2차 주민발의를 접수했다. 오영선 집행위원장은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의 압박이 높아지자 시의원들도 만장일치로 주민 조례를 가결했다"면서도 "그런데도 몇 년째 시 집행부에서 안 움직였다"고 비판했다.
주민들이 조례안을 발의한 지 8년이 지났지만 병원은 착공되지 않았다. 성남시는 수정구에 있는 옛시청사를 다음달 말까지 철거한다고 14일 밝혔으나, 병원건립 예산은 전체 1417억 원 중 45억9800원만 통과된 상태다. 한나라당 시의원들은 "시립병원을 직영하면 적자가 예상된다"며 "대학병원 위탁이 조례에 명문화되지 않으면 시립병원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성남시립병원설립운동본부 측은 "공공병원이 적자를 내는 건 당연하다"고 맞섰다. 의료 서비스를 싸게 제공해서 그 혜택을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논리다. 오영선 집행위원장은 "오페라 공연 등을 하는 성남아트센터도 매년 250억~270억 원씩 유지비가 든다"며 "하물며 일반 공원을 관리하는 데도 몇 십억 원씩 드는데 왜 병원 운영은 적자 개념으로 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위탁 운영하면 병원비 오를 것…운영방식 논의에 주민 참여 보장해야"
한나라당 시의원들이 주민 발의안을 폐지하고 지난 7월 새로 통과시킨 조례안에 대해 경기도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재량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성남시에 재의를 요구할 것을 지시했다. '위탁 경영'을 명문화한 조례안이 상위법인 '지방의료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서 조례로 위임된 권한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도 법제처 해석을 통해 비슷한 내용을 성남시에 통보했다. 이에 따라 성남시는 지난달 시의회에 재의를 요청했지만, 시의회는 재의 요구에 미온적인 입장이다.
성남시 중원구가 지역구인 신상진 한나라당 의원은 '지방의료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아예 개정하는 방안을 택했다. 지난 5일 발의된 개정안이 통과되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만으로도 지방의료원 운영을 대학병원에 위탁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는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경우에 지방자치단체장이 지방의료원 운영을 대학병원에 위탁할 수 있었다. 대신 신 의원은 위탁 병원의 비급여 진료비와 본인부담금 일부를 국비에서 지원하도록 했다.
성남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병원 운영을 외부에 맡기면 의료서비스의 질은 그대로인데 의료비 자체가 오를 것"이라고 우려한다. 오른 병원비에 국고를 지원한다고 해도 그 이익은 병원에만 돌아가리라는 주장이다. 오 집행위원장은 "서울시의 공공병원 중에 위탁 운영하는 보라매병원은 건강검진하는 데 400만 원이 드는데, 직영하는 서울의료원은 똑같은 검진에 120~130여만 원이 든다"고 거들었다.
위탁 운영이 주민자치를 훼손할 것이라는 염려도 있다. 김 대표는 "시립병원을 위탁에 맡기면 병원 운영에 대한 주도권은 위탁기관이 가져간다"며 "시가 공공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결과를 통보받는 식으로 변한다"고 우려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는 배제된다는 것이다.
그는 "병원을 지으려면 앞으로 적어도 3년은 걸릴 것"이라며 "병원을 짓는 동안 위탁, 직영, 협진 등 여러 가지 운영 방식에 대해 시민들과 토론해서 성남에 맞는 운영 방식을 찾자는 건데, 시의회는 무조건 위탁경영이어야만 한다며 예산을 안 준다니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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