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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권력의 횡포를 눈 부릅뜨고 보실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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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권력의 횡포를 눈 부릅뜨고 보실 것 같은데…

[리영희 선생님을 보내며]

1976년인가 친구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신 리영희 선생님과 오후 이른 시각부터 거의
밤 깊도록 천도교 수운회관 근처에서 뒤풀이를 했다.

수배 중이었다가 몇 년 만에 결혼하는 친구였으니 리영희 선생님이 마음을 썼을 법도 하다. 그 시절은 대학에서 문리대를 중심으로 탈패가 새로운 저항문화운동을 막 하는 참이었으니까 갖가지 노래와 춤이 어울러졌음은 물론이다. 우리 중에서는 고무신짝을 벗어 그 속에 막걸리를 부어 마신 사람도 있었다.

리영희 선생님은 맨 마지막까지 우리와 자리를 같이 했다. 권력 앞에 처참하게 밟히고 있는 그 시절의 인권이 동물적 수준 밖에 안 된다고 보시던 선생님. 40대 후반으로 젊은이들의 저항의 몸짓에 호흡을 함께 했다고 생각한다. 대취해서 방향도 잡지 못하는 선생님을 나와 다른 친구 둘이서 화양동 자택으로 부축해 간 것이 30여년 전.

그런데 지금 권력의 횡포가 그 시절을 연상케 한다. 기자들이 방청석에서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만 다를 뿐, 아니 그 기자들 다수가 유린되고 있는 현장이 마치 둘이다 어울러져 난장판이 된 것처럼 제목들을 뽑았다.

"권리적 측면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현대적인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이었다"

2001년인가 20여년의 강요된 망명생활 마치고 귀국한 또 다른 친구와 리영희 선생님을 찾으니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리영희 선생님이 가끔 좋아하시던 죽을 잘 만드는 집이 을지로 백병원 앞에 있었다. 알피니스트도 한 그 가게 주인이 누구보다도 리영희 선생님의 소식에는 정확했다. 그 죽 집의 조그만 방에서 가끔 토론들을 하셨고, 또 입원 후에도 죽을 드시고 싶다고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거의 소탈하신 면모와 체취를 남기셨다. 우리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사모님과 누님들이 계셨는데, 며칠 전에 만난 것처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다.

권력의 횡포에 준엄했던 선생님이 어제 5.18국립묘지에 영면하셨다. 내일이 삼우제니까 아직 다 눈을 마저 감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민주의 문' 망루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한 말씀을 추상 같이 하실 것 같은 예감이 온다.

인생을 끌고 가는 마차가 도착하는 시점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무릇 언제나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하다가 가는 게 인생이고, 또 그 가는 길이 따라오는 후인들에게 "길"이 되어야한다. 사람이 소탈하고 담백해야 그 '길'도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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