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 관심은 많았지만 역도는 참 지루했다. 인상과 용상이 어떻게 다른지 경기를 보며 제대로 알게 됐지만 엄청난 힘과 집중력으로 바벨을 드는 역사(力士)의 땀의 의미까지 생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저 자리를 지키고 필요할 때마다 박수를 치는 게 다였다.
정작 '작은 거인' 전병관 선수가 은메달을 받는 모습은 TV로 봤다. 그날 역도 경기장에는 관중이 꽤 모였다. 다른 날보다는 학생들을 동원할 필요가 적어 보였다.
꺼림칙한 관중동원 신기록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4일 막을 내렸다. 우려했던 대로 한국의 성적은 저조했다. 한국은 역대 세계육상대회 세 번째로 개최국이 메달을 따지 못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88올림픽 때 4위를 차지했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4강에 오른 한국의 힘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록 하나를 만들었다. 관중 동원 세계 신기록이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사상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물론 대구 시민들의 관심이 이 기록 달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언뜻 보면 한국은 이제 '태극마크'가 보이지 않는 국제대회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샘솟게 한다.
그렇지만 이 기록에는 88올림픽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게 사실이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귀빈석과 초청석을 시청 공무원으로 채웠다. 주로 예선 경기가 펼쳐지는 오전에는 전세버스를 탄 학생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대구시가 이번 대회 관람을 '체험학습'으로 인정해 줬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한국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아마도 이런 방법들이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올림픽 전초전으로 위상이 떨어지고 있는 세계육상대회가 안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오사카나 베를린에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유사한 관중 동원 프로젝트가 펼쳐졌다.
그래도 꺼림칙하다. 온도, 습도, 풍향과 스타급 선수들의 불참 등으로 세계 신기록이 적게 나온 대구 대회가 대신 관중 동원 신기록에 목을 맨 것처럼 보여서다.
엔터테이너 볼트와 '쿨 가이'로 변모한 류샹
이번 대회 최고 스타인 우사인 볼트는 이미 전설적 스프린터지만 엔터테이너에 가깝다. 경기 시작 전 카메라를 향해 그가 거침없이 펼치는 쇼는 힙합 가수 저리가라다. 이런 게 그가 트랙에서 펼치는 '번개 쇼' 이상으로 팬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다. 그는 자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축구를 해보고 싶다고 하는데 은퇴 후에 연예계로 진출하는 게 훨씬 더 어울려 보인다.
100m 결승에서 부정출발로 실격 당해 충격을 줬지만 볼트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용수철처럼 금방 부활했다. 그는 200m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수많은 사진기자들을 따돌리려고 민첩하게 방향을 바꾸면서 팬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400m 계주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뒤에는 인터뷰 하러 온 여자 아나운서 앞에서 살짝 '초콜릿 복근'까지 공개하는 센스도 보여줬다.
▲ 제13회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400m 계주 결승에서 역주하고 있는 우사인 볼트. ⓒAP=뉴시스 |
중국의 허들 스타 류샹은 불운했다. 옆 레인에서 뛰는 로블레스의 방해로 레이스 막판에 최고 스피드를 낼 수 없었다. 그는 대범했다. "경기는 경기일 뿐이고 경기장 밖에서 난 로블레스와 친구"라고 했다. 그는 "즐겁게 경쟁하고 싶다. 재경기를 하면 다른 선수들에게 공평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류샹은 3년 전에 비해 정신적으로 성숙해 보였다. 그는 2008 베이징올림픽 110m 허들예선에서 다리 부상으로 경기를 기권했다. 첫 번째 스타트에서 다른 레인 선수의 부정출발로 류샹은 다시 스타트 블록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때 그는 인상을 쓴 후 신경질적으로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그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고 말했지만 중국인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의 쾌속질주를 못 본 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태도가 대형 스타답지 않아서였다.
손기정 신화와 한국 육상의 마라톤 독주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기록 영화 <올림피아>를 만든 레니 리펜슈탈은 이 대회에 출전한 주요 선수들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흔히 이 기록 영화는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그녀가 주목한 선수들은 다양했다. 특히 그녀는 미국의 흑인 스프린터 제시 오웬스의 다리 근육움직임을 집중적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오웬스의 순진한 모습도 눈에 띈다.
그녀는 영원한 한국의 스포츠 영웅 고(故) 손기정 선생의 모습도 빼놓지 않았다. 그녀가 주목한 건 선생의 찡그린 얼굴 모습과 흐트러지지 않는 어깨였다. 선생의 표정에는 42.195Km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의 고된 여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인내'라는 두 글자가 자연스레 생각나는 장면이다. 선생이 고향 신의주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체득한 장거리 육상의 노하우가 표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국은 지금까지 마라톤 이외의 육상 종목에서 세계적 수준에 접근한 선수가 없었다. 오직 마라톤만이 한국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종목이었다. 손기정 선생을 시작으로 1947년 보스턴 마라톤의 영웅 서윤복 그리고 황영조, 이봉주 등이 그 영광이 주인공이었다. 왜 그랬을까? 마라톤이 한국인의 신체적 특성에 비교적 잘 맞는 종목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손기정 선생이라는 확실한 롤 모델이 있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마라톤은 올림픽에서 한국 육상의 전략종목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육상 종목은 그렇지 못했다. 특정 종목이 일단 한 번 전략종목으로 분류되면 속전속결로 그걸 '효자종목'으로 바꿔 놓았던 게 태능선수촌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메달권에 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 종목은 전략종목에서 빠졌고 찬바람만 불었다. 희망대신 절망이, 금메달 대신 자조 섞인 표현인 '목메달'만이 그 종목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육상, 전국체전이 아닌 국제대회에 초점을 맞춰라
그런데 육상은 좀 달랐다. 전국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는 실업팀(주로 시청팀)에서 꽤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 체전에 메달도 많이 걸려 있고, 내 고장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육상 선수에 지자체가 지대한 관심을 보여서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 사이에서는 '육상 귀족'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그래서 육상 유망주들이 안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목표점이 아시아나 세계가 아니라 국내대회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다.
대구 세계육상대회의 최대 유산은 단순히 관중 동원 신기록이 아니다. 한국 육상의 현주소를 실로 오랜만에 국민들이 지켜봤다는 점이다. 이제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세계의 벽을 향한 도전해야 한다는 게 그 핵심일 수밖에 없다. 올림픽에서 격투기 종목 위주로 메달을 따던 20세기 한국 스포츠가 수영과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딸 줄 상상이나 했을까?
육상도 할 수 있다. 원대한 목표를 세운 한국 육상 선수들의 기록 단축에 뜨거운 박수를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축구만큼 지원해 주면 우리도 잘 할 수 있다"는 한 육상 선수의 말은 깊게 음미해 봐야 한다. 그 지원의 시작은 역시 관심이다.
아베베의 맨발의 전설이나 임춘애의 라면 신화는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아베베는 가난 때문에 맨발로 뛴 게 아니다. 로마 올림픽 때 산 신발이 맞지 않아 물집이 생겨서 할 수 없이 맨발로 뛰었다. 임춘애도 그저 라면을 좋아했을 뿐인데 좀 더 드라마틱한 기사를 원했던 기자에 의해 그녀가 가난 때문에 라면만 먹고 뛴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육상 문화는 변했다. 볼트의 익살스러운 세리머니와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류샹의 태도가 모든 걸 말해준다. 한국의 육상 선수도 변해야 하지만 팬과 언론도 달라져야 한다. 신화와 전설의 탄생을 눈이 빠지게 기다릴 게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 유쾌하고 신바람 나는 한국 육상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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