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의 투표이론에는 소위 '중위투표자의 정리(median voter theorem)'라는 것이 있다. 중위투표자란 투표자를 어떤 기준(예컨대, 정치성향, 소득순, 나이순 등)에 따라 차례로 배열했을 때 중간에 위치한 투표자를 의미한다. 중위투표자 정리는 다수결로 의안을 결정할 경우 바로 이 중위투표자가 가장 선호하는 의안이 최종 선택된다는 내용이다. 투표자를 정치성향에 따라 배열했을 때 대체로 중도성향의 투표자가 중위투표자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서 세 사람의 유권자가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매우 보수적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진보적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중도적이라고 하자. 보수적인 유권자는 보수적 정책을 가장 선호하지만, 진보적 정책보다는 차라리 중도적 정책을 더 선호한다. 반대로 진보적 유권자는 진보적인 정책을 가장 선호하지만, 보수적 정책보다는 차라리 중도적 정책을 더 선호한다. 이럴 경우, 보수적 정책과 진보적 정책을 투표에 부치면, 중도적 투표자가 어느 쪽에 표를 던지느냐에 따라 선거결과가 결판난다. 만일 보수적 정책과 중도적 정책이 대결하면, 진보적 투표자는 중도적 정책을 지지하므로 중도적 정책이 과반수를 얻어 투표에서 이긴다. 진보적 정책과 중도적 정책이 대결하면, 보수적 투표자는 중도적 정책을 지지하므로 역시 중도적 정책이 과반수를 얻어 선거에서 이긴다.
이와 같이 그 어느 경우든 중도성향 투표자들이 선거결과를 결정하게 되므로 이들의 표를 의식하는 선거 판의 후보자나 정당들은 한결같이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닌, 어정쩡한 공약을 들고 나오게 된다. 선거철마다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거대 정당들의 정강이나 공약들이 내용상 비슷해지고 정당의 색깔이 애매모호해진다. 양당이 확연히 구분되는 정책으로 대결하기를 꺼려한다. 보수정당의 공약에 진보적 내용이 잔뜩 들어가 있고, 개혁정당의 정강이 보수색깔을 띤다. 그동안 무상복지를 극력 거부하던 한나라당이 선거철이 다가오자 70% 무상복지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오세훈시장의 제안은 어정쩡한 것이었다. 오 시장이 발의한 안(제1안)은 무상급식을 전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50%까지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이 의중에 두고 있다고 알려진 70%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다. 오 시장의 안에 대립되는 다른 안(제2안)은 100% 무상급식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당장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앞으로 단계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무상급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보수층이나 진보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보기에게는 이번 주민투표에 발의된 두 안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두 안에 별 차이가 없다. 결국 두 안 모두 무상급식을 실시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중도성향 시민들이 보기에 50%나 70%나 100%, 그게 그것이다. 그러니 중도성향의 시민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놓고 왜 시장이 울고불고 하며, 왜 정치가들이 야단법석들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법하다. 게다가 지난 번 선거에서도 무상급식문제로 서울시가 한바탕 떠들썩하지 않았던가. 중도성향 시민들이 무상급식 문제에 식상했을 법도 하다. 이런 저런 심정으로 중도성향 시민들이 오 시장의 어정쩡한 제안에 시큰둥했고, 그 결과가 주민투표의 실패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번 주민투표는 결과적으로 '나쁜 투표'였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안에 거금을 들여서 주민투표를 강행했다. 이번 주민투표 실시에 들어간 돈만 180억 원에 이르고 가을의 시장선거에 400억 원의 거금이 또 필요하다. 이 모두가 혈세에서 나온다. 여기에 서울시가 주민투표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시정에 전념하지 못한 손실까지 고려하면 이번 주민투표가 시민에게 입힌 피해액은 1000억 원이 넘을지도 모른다. 이 돈이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추가적으로 무상급식할 수 있는 큰 금액이다. 부자감세 철회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보수층이 이런 혈세의 낭비에는 왜 잠자코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 주민투표는 한 정치지도자의 무모한 정치적 야망이 국민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안기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나쁜 투표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보수언론인은 주민투표 직전에 "나쁜 정책은 있어도 나쁜 투표는 없다"라고 말하면서 신문지면을 통해서 은근히 서울시민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투표가 '나쁜 투표'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나쁜 투표'가 없다고 말하려면 우선 나쁜 투표가 무엇인지부터 말하는 것이 순서다. 어떻든, 득보다 실이 큰 투표가 나쁜 투표가 아니라면 어떤 투표가 나쁜 투표인가?
말 그대로 투표는 시민권을 행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쁜 투표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보수층 인사들은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면서 국민의 '나쁜 선택'에 혀를 차지 않았던가.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나라 보수층은 노무현정권 내내 노무현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쁜 선택을 한 투표는 나쁜 투표가 아닌가? 세간에 돌아다니는 말로는 오 시장을 지지한 25.7% 중에는 오 시장의 외모나 눈물에 마음이 흔들려서 투표를 한 강남 아줌마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하는데, 정작 주민투표안의 내용과 관계없는 그런 투표는 나쁜 투표가 아닌가?
사실, 오 시장이 공개석상에서 읍소하고, 큰 절 하고, 투표결과에 시장 직을 거는 등 정치적 쇼 때문에 이번 주민투표는 너무 정치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주민투표 내용보다는 오 시장에 대한 지지여부가 큰 관심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순전히 오 시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투표하는 시민이 적지 않았고, 반대로 투표하는 행위가 오 시장에 대한 지지로 비쳐지는 것이 싫어서 투표장에 가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투표사안과 관계없이 감정에 휩쓸린 투표는 좋은 투표라고 할 수 없다. 이왕 엎질러진 물, 10월 시장보궐선거에서는 '나쁜 투표' 없이 '좋은 투표'만 있기를 기대한다.
▲ 무상급식이 이뤄지는 초등학교 교실 풍경. ⓒ프레시안(이경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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