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노조 관계자들은 이런 증가세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한국노총은 "신설 노조의 80∼90%는 대부분 사측의 필요로 만들어진 페이퍼 노조"라고 분석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기존 노조를 지키든, 새로 노조를 만들든 모든 조건이 사측에 유리하다"고 토로했다.
복수노조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던 양대 노총이었다. 여전히 노조 관계자는 "복수노조 제도는 노동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좋은 제도"라고 했다. 단, "문제는 교섭창구 단일화 조항"이라고 했다. 이 조항이 노동자가 아니라 사측의 '교섭 대상 선택권'만 높여준다는 것이다. <프레시안>은 복수노조 시행 40여 일째를 맞아 '교섭창구 단일화'로 어려움을 겪는 사업장을 찾았다. <편집자>
- 복수노조 시행, 그 뒤엔 ① 연세대 청소노동자들의 '수상한' 갈비탕 회식 |
평택역에서 약 15분을 차로 달리면 허허벌판에 '올빼미' 걸개그림이 걸린 창고가 나온다. "올빼미는 밤에 일하고, 사람은 낮에 일하고." 창고 한 구석에 적힌 문구다. 창고 앞에는 비닐하우스가 있다. 직장폐쇄에 맞서 회사 앞에 눌러앉은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80일 넘게 먹고 자는 곳이다. 회사는 '밤에는 잠을 자고 싶다'는 노동자들에게 세 달째 '비닐하우스 단잠'을 선물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
교섭창구 단일화 앞둔 유성기업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야간근무 철폐'를 요구했다가 직장폐쇄로 공장 밖을 떠도는 동안, 유성기업에는 제2노조가 들어섰다. 개별적으로 공장에 복귀한 일부 노동자를 중심으로 지난달 21일 설립신고를 마친 기업노조다.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를 탈퇴하고 새 유성기업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은 전체 566명 중에 140여 명. 69명으로 시작했던 신규노조는 2주일 만에 조합원을 두 배 더 확보했다.
현장에서는 "회사가 조합원들의 일괄 복귀를 막으면서 개별적으로 복귀한 노동자들을 상대로 복수노조 설립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회사 관리자들이 조합비를 월급에서 일괄 공제하는 '조합비 공제' 거부 서명을 일일이 받고 돌아다녔다는 증언도 속속들이 나왔다. 사측이 제2노조를 우회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유성기업 측은 인터뷰를 거절했고, 제2노조 위원장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의혹은 지난달 27일 '교섭 요구 사실 공고문'이 아산공장 정문 앞 담벼락에 붙으면서 더 커졌다. 지난 3월에 만료된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의 임금협상 요구를 사측은 그동안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복수노조가 들어서고 난 후인 7월에서야 사측은 태도를 바꿨다. 여기에 제2노조인 유성기업노조가 교섭참가를 신청했다. 최종적인 교섭 요구 단체는 오는 14일에 확정될 예정이다.
제2노조의 등장에도 농성장에 남은 노동자들은 예상 외로 덤덤했다. 이들은 "제2노조가 들어서리라고 다들 예상했다"고 입을 모았다. 9년차 유성기업에서 현대·기아차 부품을 만들었다는 임춘석(가명·37) 씨는 "제2노조 조합원을 늘려야 회사가 현 노동조합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지금도 관리자나 제2노조에 들어간 사람으로부터 노조를 탈퇴하라는 전화가 항상 온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는 유성기업 노동자들. ⓒ프레시안(김윤나영) |
"교섭권 주고 안 주고는 회사 마음?"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일주일 가량 앞두고, 유성기업지회 또한 차분한 모습이다. 현재까지 과반수 노조 지위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섭 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친다면 유성기업지회는 올해 임금협상에서만큼은 '교섭 대표 노조'가 될 확률이 크다. 육영수 유성기업지회 노동안전부장은 "현장에 들어갔어도 노조를 탈퇴하지 않은 조합원이 절반"이라며 "우리가 다시 들어가면 금속노조로 돌아올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에 복귀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회사가 개별교섭을 시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개정 노조법상 사측은 교섭창구 단일화에 동의하지 않으면, 새로 들어선 제2노조와 별도 교섭을 진행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유성기업지회보다 제2노조가 더 좋은 임금 조건을 얻을 수도 있다.
노조 관계자들은 "'교섭창구 단일화'를 할지 말지 칼자루를 사측이 쥐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측이 지원하는 노조가 과반수 노조면 즉각 독점교섭권을 인정해 나머지 노조를 무력화할 수 있고, 그렇지 않아 사측이 불리한 경우는 개별교섭으로 특정 노조를 우회 지원할 수 있다.
결국 회사가 지지하는 노조는 소수노조든 다수노조든 사측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교섭권'을 확보할 수 있다. 반대로 회사의 지원을 못 받는 노조는 '다수를 점해야만' 교섭권이 주어진다.
유성기업지회에게 더 큰 문제는 다음 단체협상이다. 이번 교섭은 1년 단위로 체결하는 임금협상이다. 내년 3월에는 2년 단위로 체결하는 단체협상이 만료된다. 창구 단일화 절차는 단협 만료 3개월 전인 올해 12월에 또 개시된다. 만약 유성기업지회가 12월에도 과반수 지위를 얻지 못하면 2년간 교섭권과 파업권을 빼앗길 확률이 크다. 소수노조가 되면 회사와 대화 자체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합법 파업을 할 길조차 원천 봉쇄된다는 뜻이다. 노조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다.
▲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농성하는 회사 근처 창고와 비닐하우스. ⓒ프레시안(김윤나영) |
"이번만큼은 회사가 작정한 것 같다"
25년째 유성기업에서 일한 김정만(가명·45) 씨는 "그 전에도 파업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측과 대립한 적이 없었다"며 "이번만큼은 사측과 현대차가 더는 노조에 당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5월 현대차 구매관리본부장의 차 안에서 입수된 '유성기업 노조 파괴 문건'이 공개된 다음부터는 더욱 그렇다고 했다. (☞관련 기사 : 유성기업 '직장폐쇄' 배후에 현대차 있다?)
직장폐쇄가 장기화할 수 있는 데는 노동자들의 분열도 한 몫했다. 전체 조합원의 60%가 복귀해 공장이 어느 정도 가동되는 상황에서 회사가 입는 타격이 덜해졌기 때문이다. 29년째 아산공장에서 일했던 정세욱(가명·54) 씨는 "회사 관리자가 공장에 개별적으로 복귀한 사람에게 '당신들만 안 들어왔으면 일찍 끝났을 텐데,(회사가 직장폐쇄를 풀고, 사태가 일찍 정상화됐을 텐데) 당신들이 들어와서 늦어진다'고 비아냥거렸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여기에 제2노조까지 들어서면서 농성장에 남은 조합원과 제2노조를 주도했던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의 골마저 생겼다. 정 씨는 "정년이 3~4년밖에 안 남은 사람들이 중심이 돼 회사 편에 붙어 제2노조를 세웠다"며 "이들은 한 명이라도 더 공장에 들어오게 해서 그들을 저쪽 노조(제2노조)에 가입시키고 이쪽 노조 숫자를 줄이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한 달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석달째 월급을 못 받는데 나 혼자 벌자고 (개별적으로 공장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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