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샤(自由社) 교과서가 묘사하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역사는 열강의 침략을 당하다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는 무기력한 나라로 그려진다. 이 교과서는 중국이 1840년 아편전쟁에서 압도적인 힘을 지닌 영국에게 패배하여 굴욕적인 난징조약에 조인하여 반식민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이 무기와 군대의 규율, 훈련에서 우위에 있었고 일본인 전체의 의식이 하나로 뭉쳐 있어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은 것을 당연시하면서 삼국간섭으로 이를 반환하게 되자 러시아에게 와신상담을 하였다고 전쟁준비를 합리화한다.
20세기 전반의 중국도 일본에 대해 배외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에게 침략당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1915년 21개조 요구에 대해 중국 측의 저항은 간단히 취급하고 중국의 배일운동을 강조하여 일본의 '협조외교'와 대비시키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배일운동은 소련의 공산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과격해졌고 일본인을 습격했다는 등의 서술을 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한 중국인의 저항을 희석시키고 오히려 중국측이 침략당할 행동을 한 것으로 묘사한다. 일본의 만주침략도 소련의 위협과 국민당에 대한 대응으로 관동군이 만주를 군사점령하려 했던 것으로 설명하면서 중국침략을 정당화하는 건 마찬가지다.
1931년 9·18사변도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모든 책임을 관동군에게 돌렸다. 또한 일본이 만든 만주국은 일본의 중공업 진출 등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중국인들이 이주하여 왔다고 하여 일본의 만주국 통치를 미화했다.
지유샤 교과서는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의 방침에 기초하여 국공양당이 항일에서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고 1936년 12월에 발생한 서안사변을 통해서 중국에서 일본과 싸우려는 체제가 갖춰졌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서술은 1937년 7·7사변 이전에 이미 중국이 일본과 싸우려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책임을 중국측에 전가하려는 속셈이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도 일본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고 있으며 8·13 상해사변을 자세하게 서술하면서 전쟁이 확전된 것을 중국측의 책임으로 돌리려 한다.
또한 지유샤교과서는 중국군이 독일의 군사지도와 무기원조를 받아서 강력한 군대였던 것으로 평가한다. 이는 일본군의 군사력이 당시 중국군을 압도하고 있던 사실을 숨기고 양국이 대등한 상대인 듯 묘사하려는 의도다. 상해 지역에서 중국군이 일본인 거주구를 포위했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전쟁의 책임을 중국 측에 떠 넘기거나 중일이 공유했다고 해석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도 검정신청본에서 "난징이 점령되었을 때에 중국이 군민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것이 후에 '난징사건'으로 선전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하여 국민당정부의 선전으로 난징대학살을 호도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검정을 통해서 난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수정되었지만 난징대학살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 지난 200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60년을 기념해 중국 베이징 중국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난징대학살 기념전. ⓒ로이터=뉴시스 |
이쿠호샤(育鵬社) 교과서는 지유샤 교과서와 유사한 서술을 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지만 일정하게 차이점도 보인다. 이 교과서는 1915년 일본이 중국에 제기한 21개조 요구로 인하여 중국에서 일본에 대한 반발이 강해지고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열국의 불신감을 초래한 교섭 방법에 대해 일본 국내에서도 비판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쿠호샤 교과서는 만주문제와 중일전쟁의 과정에 대해서는 지유샤 교과서와 유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몇 차례의 평화교섭이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군도 미국과 소련의 원조를 받고 있던 장개석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여 전쟁이 계속된 책임을 중일 양국의 공동 책임으로 돌린다.
일본 우익교과서의 침략을 호도하는 자국중심의 국수적인 서술은 자유와 평등, 평화, 민주주의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주변국과의 갈등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일본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서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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