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이라는 이름은 이제 단순히 노동운동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진숙은 연대와 헌신과 희생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김진숙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내려진 해고를 철회하기 위해 35미터가 넘는 크레인 위에서 160일이 넘는 농성을 진행하고 있을 때 그녀는 노동운동가 김진숙을 넘어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었다.
김진숙을 한국사회의 희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명하다. 그녀가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잊은지 오래인 가치들이 아직 소실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경쟁과 승리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구매력의 크기를 행복과 동일시하며,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우승열패의 원리는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자리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다.
반면 타인과의 연대, 타인을 위한 헌신과 희생, 사람 사이의 우애, 공존 같은 가치들은 한국사회에 너무나 희소하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이런 가치들을 불편해하고,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대, 희생, 우애, 공존 같은 가치들을 배우거나 익힐 기회가 없었다. 공존 대신 경쟁을, 우애 대신 소비를 택해 삶이 풍부해지고 인생이 행복하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소수를 제외하곤 한국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대체로 불행하게 살아 가고 있는데, 그게 꼭 경제적 빈곤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 행복함을 느끼는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의 결손에서 비롯되는 바가 더 크다. 요컨대 연대, 우애, 헌신, 희생, 공존 같은 가치들의 결핍이 한국사회 구성원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김진숙은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실망하고 낙담하여 우승열패 신화에 기꺼이 무릎 꿇을 때 이를 홀로 거부하며 단호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녀의 투쟁은 경쟁, 승리, 효율에 맞서 연대, 우애, 헌신, 공존을 옹호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녀의 싸움이 단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철회라는 목표에만 갇혀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진숙의 싸움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들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옳다.
김진숙의 삶은 파란과 곡절로 점철됐다. 그녀가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핍진한가를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생이 모욕이고 고난일 수 있다는 것을 그녀를 보고 알겠다. 그녀가 진정 존경스러운 것은 인간의 존엄을 유보하거나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 속에서도 그녀가 스스로를 오롯이 지키며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지배당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김진숙은 보여준다.
분명 김진숙은 조남호 회장보다, 허창수 회장보다, 이건희 회장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김진숙은 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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