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www.snulife.com |
총장실을 점거중인 한 학생이 '스누라이프'에 올린 글에서 밤새 다음 강의 숙제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대학본부를 세미나실로 활용하자거나 중앙도서관처럼 여기서 공부하자는 제안 등, 단 5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새로운 저항운동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특히 혼자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공간인 '원자'들의 공간을 만들어놓은 것은 기성 운동논리에서는 상상키 어려운 기발한 발상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패러디와 알레고리, 탈권위주의 전략은 벤야민의 파상력(破像力)이라 부르기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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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와 대학생은 '상상력'을 가지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글로벌하고 진취적인 상상력을 지닌 인간이 되어야 함을 사회는 역설한다. 그러나 벤야민의 이론체계에서 드러나는 파상력을 지닌 사람은 파괴자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파상력은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상상력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이다. 파상력은 또한 인식주체의 내적 표상능력을 의미하는 상상력과 달리,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영상들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파괴하는 우상 파괴적 권능을 내포한다."(<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80~81면)
우리는 부재하는 대상(돈, 명예 등)을 상상하며 미래를 준비한다. 따라서 기존의 질서에 최대한 순종하며 거기에 맞춰 살아가려고 애쓴다. 특히 이미 무한경쟁사회에서 어느정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서울대생에게는 이런 '상상력'의 유혹은 매우 클 것이다. 부재하는 미래의 부와 명예는 졸업과 동시에 곧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상력에 도취된 서울대생의 전형을 사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후반부터 캠퍼스에 출몰하기 시작한 SNU라는 이니셜이 박힌 서울대 점퍼를 입은 학생들에서 찾은 적이 있다.
대학점퍼를 입는 캠퍼스 풍경은 대학원 재입학생인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2007년 졸업할 때쯤 커피 체인점과 기업 브랜드가 박힌 건물이 입점하는 중이었으므로 캠퍼스의 '하드웨어'가 바뀐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대세이니 그닥 놀랄 일이 이니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대학의 건물 사이사이로 서울대 이니셜이 박힌 점퍼를 입은 학생들이 출몰하는 광경은 너무도 생경했다.
최소 몇년 전까지 서울대라는 학벌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선 부끄러운 '주홍글자'였고 그래서 내심 학벌경쟁의 승자임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더라도 최소한 서울대를 드러내는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이 어색한 대학문화를 당시 대학생들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년 사이, 대학이 세계화되어서일까. 미국대학의 캠퍼스처럼 이제 국내 대학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학 이니셜이 박힌 옷을 입는 대학문화가 도래했다.
물론 졸업후 취업시장에서는 서울대라는 학벌 덕택에 대기업에 무난히 입성하면서도 겉으로 서울대를 드러내놓지는 않는 '위선적' 행태보다, 떳떳하게 자신이 서울대생임을 드러내는 대학의 신(新)문화 현상은 외려 솔직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또한 대학을 드러내는 옷을 입은 그들의 속내가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자신들이 자랑스러워서인지, 아니면 그냥 학교점퍼이기 때문에 입은 것인지 그 속내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랑스러워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학교를 배회하는 서울대 점퍼를 볼 때마다 왜 작년에, 삶의 길을 잃거나 상처받을지 알면서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며 생각한대로 '자퇴선언'을 행위한 고려대 학생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씁쓸했다.
이처럼 서울대생들은 철저하게 현재 가지지 못한 기득권에 대한 '상상'에만 매몰되어 승자의 위치에 만족해하는 집단으로 규정해버리던 나를 반성케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상총회의 성사와 대학본주 점거라는 초유의 사태. 그리고 거기에 펼쳐지는 여러 저항의 항연들은 상상력이라기보다 기존의 것들을 깨뜨리는 '파상력'의 실현 그 자체였다. 사실 지금의 서울대 학부생들은 법인화가 되어도 일차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1~4년 후에 '영예로운' 졸업식과 함께 사회의 유수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기 쉬울 터이니. 당장 해야할 영어시험 준비와 고시준비, 프리젠테이션 준비에 혼힘을 쏟아야 할 판국에 한가하게 본부점거라는 '시간낭비'를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서울대 법인화가 되어 등록금이 많이 오른다 하여도 이들은 맘만 먹으면 '사교육의 과외시장'이라는 유용한 밥벌이 수단이 있지 않은가? 굳이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며 상상하던 미래를 위해 힘써야 할 이들이 대학본부를 점거했다는 사실은 파상력의 실현 그 자체다라고 밖에 표현하기 힘들다.
특히 그 저항의 구체적 모습이 벤야민이 설명하는 파상력의 '인용법' 전략과 왜 이리 닮아 있을까?
"파괴와 구제의 변증법은 인용의 테크닉에서도 발견된다. 인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용문이 본래 속해 있는 텍스트의 허위적 객관성 즉 문맥을 폭파하는 작업을 전제로 한다. 인용은 일종의 절도이다. 그것은 원래의 문맥으로부터 인용의 대상이 되는 문장을 폭력적으로 절취하는 행위이다. 그 과정에서 인용된 문장이 원래 속해 있던 문맥은 손상되고, 그 문맥이 생성시키던 의미구조도 파손된다."(같은 책, 182쪽)
대학본부 점검중이라는 단어에서 'ㅁ'만 빼서 점거중이 된다는 것은, 점검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수리보완의 맥락을 넘어 대학본부를 점거한다는 것은 곧 문제시되는 법인화절차와 비민주성을 본원적으로 재검토한다는 의미에서 점거가 되어버린다. 또한 대학본부의 법인화는 하나의 대학측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강좌'였으나 강의의 비민주성과 내용의 부적절함에 학생들이 스스로 교수의 권위에 도전하여 폐강시켜버린 것이다. 점검과 대학본부의 법인화 강좌라는 인용을 통해 기존의 맥락을 절취하여 원래 속해 있던 권위주의적 문맥을 깨뜨리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이런 '언어유희'가 바로 벤야민이 말한 인용을 통한 파상력의 실현이 아닐까?
"파상력은 상(像)을 지어내거나 그것을 변형하는 힘으로 이해되는 상상력과 달리, 기본적으로 상을 파괴하는 힘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상력은 일체의 가상이 가상임을 꿰뚫고 그 가상이 행사하는 환영적 위력을 분쇄함으로써 엄폐되어 있던 진상(眞想)을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같은 책, 191~92면)
"요컨대 파상력의 어머니느 바로 근대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근대는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듦으로써, 모든 환(幻)을 멸(滅)함으로써 그리고 성스러운 것들의 초월적 후광을 제거하고 신비의 베일을 벗겨냄으로써, 파상의 실제 공간을 창출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208면)
파상력은 기존의 대학본부와 총장으로 이어진 위압적인고 "초월적 후광이 지닌 신비의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다. 총장과 대학본부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서비스맨'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자신들이 정해놓은 테두리 내에서 학생들이 뛰어놀 때뿐이다. 어항속 물고기처럼 모든 것이 훤히 비치는 공간에서 그 어항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때만 적당한 먹이를 던져주는 것이다. 어항 밖으로 뛰어나와 더 바다로 나아가고자 하려는 물고기들은 더 이상 서비스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다른 대학의 어항보다 좀더 큰 어항 속에서 헤엄친다고 자위하며 그 어항의 테두리 내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서울대생이 아니라 어항을 뛰어넘는 '모험'이라는 파상력을 보여준 서울대생들의 '대듦'에서, 얼마전까지 서울대 점퍼에서 느꼈던 씁쓸함과 달리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말마다 전국 중고생들의 서울대캠퍼스 투어로 북적이는데, 견학코스 중 하나로 '민주주의'의 실습장인 대학본부에 4층 '도서관'에 들러 잠시 책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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