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조작 의혹은 이미 K리그에서 2~3년 전부터 제기됐던 문제다. 한 지방 구단은 지난 해 도박 브로커와 관련된 선수를 방출시키기도 했다. 구단끼리 의심 가는 선수들의 명단을 공유해 왔다는 말까지 나왔다. 프로축구연맹도 이런 문제를 알고는 있었지만 쉬쉬했다. 이번에 검찰에 의해 승부조작 사실이 드러나자 연맹은 그저 K리그 경기를 체육복표(스포츠 토토)발행 대상에서 제외시키겠다는 한심한 대처를 했다.
연맹은 "승부조작이 일부 선수의 문제일 뿐 리그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K리그와 컵 대회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했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일부 선수만 처벌하면 끝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K리그의 치부를 모두 드러낸 한국 축구 역사상 최대 스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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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업체 돈까지 받아 컵 대회 해야 했나?
이번 사건의 책임은 선수에게 있다. 그들은 땀과 열정으로 채워야 할 축구를 모독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K리그를 '범죄의 온상'으로 만든 건 선수만의 잘못이 아니다. 올 시즌 연맹은 리그 컵 대회 스폰서 자리를 9억 원을 받고 한 대부 업체(러시앤캐시)에 넘겼다. K리그 재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부 업체로부터 후원을 받은 일로 리그의 격은 추락했다.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정규리그 경기에 비해 지극히 관심이 덜하고, 비 주전 선수들의 놀이터로 전락한 컵 대회 스폰서를 선뜻 하겠다는 기업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K리그는 대부업체로부터 받은 후원금을 포함해 올 시즌 47억 원이라는 역대최고 후원금 기록을 세웠다.
현대 계열사 오일뱅크는 타이틀 스폰서 비용으로 30억 원 정도를 냈다. 올 해 연맹 총재가 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전임 회장 시절 타이틀 스폰서도 잡지 못하던 K리그를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문제는 무관심 K리그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컵 대회에서 집중적으로 승부조작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관중도 별로 없고 미디어 노출과 거리가 먼 컵 대회는 브로커들이 아주 편안하게 승부조작을 할 수 있는 '사설 도박장'이 됐다.
사실 이전부터 컵 대회 무용론이 여러 차례 제기됐었지만 연맹은 귀를 열지 않았다. K리그의 자존심을 버려가며 대부업체 돈까지 받아 컵 대회를 하는 연맹이 승부조작을 한 선수 탓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적어도 연맹은 승부조작 파문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문제가 된 러시앤캐시컵 대회를 중지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연맹은 "(이번 사건의 여파로) 경기를 중단하면 축구팬에 예의가 아니다"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그들이 진짜 하고 싶어한 말은 "경기를 중단하면 스폰서에 예의가 아니다"가 아닌지 의심마저 드는 대목이다.
프로축구, 팀 숫자만 늘리면 된다?
프로축구는 그 동안 양적 팽창을 거듭해 왔다. 현재 프로축구 팀은 모두 16개다. 하지만 웬만한 축구 팬 아니면 이 팀들을 다 외우지 못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K리그의 팀 숫자는 임계치를 넘었다. 부실공사로 세워진 신생구단이 많다는 의미다. 물론 팀이 늘어나서 더 많은 선수들이 뛸 수 있는 공간이 생겼지만 리그 전체의 경쟁력이나 재정 안정성은 더 떨어졌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여기에는 지난 2003년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거국적 드라이브가 작용한 게 사실이다. "2007년까지 국내프로축구리그가 국제축구연맹(FIFA)의 기준인 16개 구단을 갖게 하도록 하겠다"는 청사진이다.
하지만 지자체 단체장들의 실적 쌓기 관행이 더 큰 문제였다. 프로축구 팀 창단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임기 중에 팀을 만드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물론 이들 구단은 시민공모주 형식을 취했지만 후원은 주로 지자체와 특수관계에 있는 지역 건설업체나 은행권 등에서 받았다.
그 뿐만 아니다. 선거철이면 시민구단이나 도민구단에는 태풍이 불었다. 신임 도지사나 시장의 라인이 아닌 구단 사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짐을 싸야 했다. 구단 살림의 숨통을 쥐고 있는 광고 후원을 원활하게 받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구단들은 이처럼 뼛속까지 정치적이었다.
프로축구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여기서 심화됐다. 기업체가 운영하는 명문구단과 인지도가 떨어지는 지방 시민(도민)구단의 격차는 자연스레 선수들의 연봉 차이로 나타났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졌다. 광주, 대전 소속 선수가 대거 연루된 이번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낮은 연봉을 받는 지방 시민(도민) 구단 선수가 승부조작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구조다.
연봉이 적다는 게 승부조작의 필요충분 조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연봉이 높은 선수도 승부조작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에 의해 구단 창단에만 앞장섰던 정치인들의 책임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결코 가볍지 않다.
K리그의 감시자는 있나?
K리그의 최대 문제는 아마 TV 중계 문제일 것이다. 꽤 많은 경기가 온전히 TV로 생중계되지 않는다. 매번 경기장을 찾는 팬들이 아니라면 한 시즌 동안 지속적인 관심을 갖기가 어렵다. '무관심 리그'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 야구가 좋은 성적을 낸 뒤 프로축구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었다.
국내 야구는 해외에서도 통하는 '명품 리그'라는 인식이 자리잡으면서 팬들이 부쩍 늘었다. 그 사이 야구 경기는 스포츠 채널을 틀면 늘 볼 수 있는 확실한 컨텐츠로 굳어졌다. 프로야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케이블 채널의 프로그램도 속속 생겨났다.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미모의 여자 진행자는 '야구 여신'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프로축구는 어떤가. 중계를 시원하게 해주는 법이 없다. KBS의 <비바 K리그>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프로축구 관련 프로그램도 없다. 승부조작을 사전에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사실상 전무했다.
만약 프로야구에서 뭔가 미심쩍은 일이 발생했다면 TV 생중계를 지켜 보던 눈밝은 팬들이 먼저 '네티즌 수사대'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축구는 그렇지 못하다. 문제가 된 경기의 화면조차 구하기 어렵다. 특히 컵 대회는 그렇다.
이런 상황을 스포츠 도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들이 몰랐을 리 만무하다. 여기에 사전에 포섭한 골키퍼나 수비수 실수를 통해 쉽게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축구는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 셈이다.
이번 K리그 승부조작 파문은 이 같은 '무관심'이 키웠다. 그럼에도 지난 26일 승부조작 파문과 관련해 열린 연맹 이사회에 정몽규 총재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긴급 이사회라 총재와의 일정조정이 어려웠다는 연맹의 해명이 있었지만 이는 사건의 심각성을 외면한 일종의 '무관심'이다.
총재의 임무는 스폰서 유치에만 있는 게 아니다. 프로축구에 지금 필요한 건 팬들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들이 등돌리면 프로축구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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